15세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대항해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나라가 있다. 바로 스페인이다. 옆나라 포르투갈이 엔리케 왕자가 주도한 신항로 개척으로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열었다곤 하지만 부족한 인구수와 제한된 국력은 후발주자인 스페인이 다음 시대를 주도하도록 했다. 수많은 소국으로 나눠져 있던 스페인은 때마침 하나의 국가로 거듭나 이베리아 반도의 역량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패권국이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16세기 들어 무적함대로 표상되는 강력한 군사력, 신대륙 여러 식민지로부터 당도하는 진귀한 물품 등으로 스페인의 산업과 경제, 지정학적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다. 유럽 최강이란 칭호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북방에서부터 퍼져나간 개신교와 동방의 이슬람교 세력의 확장이 무시할 수 없었으나 가톨릭 진영에선 스페인 홀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를 감당해나갔을 정도였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하였는가. 스페인의 추락이 꼭 그와 같았다. 1788년 아버지 카를로스 3세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카를로스 4세는 무섭게 성장하는 프랑스와 영국의 틈바구니에서도 스페인의 중흥을 이끌어나간 아버지를 조금도 닮지 못하였다. 그는 국정을 팽개치고 사냥에 빠져 지냈으며 아내 마리아 루이사가 국정을 제멋대로 좌우하도록 방치하였다. 제위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1808년, 그는 스페인 민중봉기로 왕좌에서 내쫓겼다. 옆나라 프랑스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이를 기화로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니, 스페인의 영광은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다시는 오지 못한 것이다.
왕비에게 모든 걸 내준 무능한 국왕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유명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이 루시엔테스의 대표작이다. 카를로스 3세가 재능을 높이 사 궁정화가로 발탁했고, 카를로스 4세 대에 이르러 수석 궁정화가 자리에 올랐다. 고야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함께 스페인 미술계가 낳은 걸출한 인물로 평가되곤 한다. 그런 그가 수석 궁정화가의 신분으로 무능한 국왕 카를로스와 지아비를 농락한 왕비 루이사를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으니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유명한 그림을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그건 이 작품이 기존 왕가의 초상을 그린 작품들과 여러모로 달리 보이기 때문이다. 왕실 가족의 초상을 그릴 때면 통상 왕을 중심에 두는 게 통례인데, 이 그림은 완전히 딴판이다. 왕은 보는 이를 기준으로 우측으로 비켜나 있고 그림의 중앙은 왕비 루이사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 위엄 있는 포즈며 복식, 통일된 분위기는 오간 데 없고, 누구는 옆을 보고 또 누구는 뒤를 보며 각자의 위치도 제대로 잡지 않고 대충 늘어선 듯 분방한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왕을 제치고 국정에 관여하는 왕비, 또 그를 수수방관하며 연일 사냥 등 노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국왕을 풍자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작품의 낯선 구도는 물론이거니와 국정을 장악하고 제 입맛에 맞는 이들을 추려 요직에 배치한 루이사의 무도함이 당대에 이미 입방아에 올랐단 점을 떠올리면 이 같은 추론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당대 궁정화가란 그리 섣부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위치라며 해석이 과도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고야가 아무리 적나라하고 파격적인 작품을 여럿 내놓았다곤 하지만, 궁정화가로 그린 작품들만큼은 왕실의 권위를 감히 훼손할 수 없었으리란 주장이다. 당대 스페인은 누가 뭐래도 군주가 군림하는 전제군주국가가 아닌가. 왕과 그 측근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당장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고야의 유령스틸컷
부귀영화
강대국 스페인은 어째서 무너졌는가
수백 년이 흐른 과거의 일을 두고 무엇이 정답이다 가려내는 건 불가능하다. 주목해야 할 건 궁정화가의 엄중한 임무에도 불구하고 고야는 파격이라 해도 좋을 이례적 작품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왕의 위치를 옆으로 옮겨두고 정 가운데엔 왕비를 두었으며 왕실의 권위를 강조하기보다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을 말이다. 고야는 그런 화가다.
고야 스스로도 결코 평온하지 않은 삶을 살았거니와 그가 모신 왕과 왕조가 스페인의 흥망성세를 한 눈에 보여주는 이들이란 점에서 그는 영화가 탐낼 만한 인물이다. 그리하여 그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작품이 여럿인데, 개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역시 <고야의 유령>일 테다. 몰락하는 스페인을 왕실 화가를 내세워 다뤘다는 점에서 설정부터 흥미롭다.
왜 아닐까. 작품 가운데 카를로스 4세와 루이사가 등장한다곤 하지만, 역사를 알지 못한 채로 영화만 보아선 그들이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를 제대로 짚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국정에 관여하는 모습이 아닌, 화가 앞에 포즈를 취하고 후에 그림을 확인하러 오는 정도에서 묘사를 그치니 말이다.
영화는 가톨릭의 권위가 전과 같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나라 밖에선 개신교가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나라 안에선 가톨릭의 엄중한 교리를 답답하게 여기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서점가에선 고야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풍자삽화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그를 국가와 종교를 모독하는 일이라며 분개하는 성직자들이 생겨날 정도다. 결국 스페인 교회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본보기식 처벌을, 과거에 행해졌으나 이제는 중단된 고문과 화형을 재개하여 신이 존재하심의 본보기로 삼기로 결정한다.
▲고야의 유령스틸컷
부귀영화
생사람 잡는 교회의 타깃 수사
여기 그 본보기로 누명을 써 죽을 위기에 처한 이가 있다. 부유한 상인 토마스(호세 루이스 고메즈 분)가 끔찍이도 아끼는 딸 이녜스(나탈리 포트만 분)다. 남달리 예쁜 그녀는 고야가 그리는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곤 하였는데, 이것이 당대 풍속에서 화가의 모델은 창녀와 같이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을 가진 엄격한 사제 로렌조(하비에르 바르뎀 분)의 심기를 거스를 줄 누가 알았으랴.
그로부터 영화는 망가져가는 이녜스의 삶을 비춘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죄목으로 끌려가 종교재판에 서고, 교회의 조사실에 갇혀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까지 당한다. 그녀를 그곳에 오도록 한 신부 로렌조는 어느 순간 그녀에게 반하여서 육욕까지 드러내니, 해맑던 십대 소녀의 운명이 이보다 참담하게 망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작게는 한 여성의 기구한 이야기를 다루고, 보다 크게는 교회의 무도함이며 당대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영화는 왕과 왕비, 즉 스페인을 망국으로 이끈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를 고야의 앞에 포즈를 잡거나 완성된 그림을 확인하러 오는 정도로만 비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루이사가 국정의 실권을 잡고 있음을, 반대로 카를로스 4세는 제 임무를 방기하고 내팽겨 치고 있음을 은근하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고야의 유령포스터부귀영화
외세에 농락당한 국가, 어디 남의 일일까
또한 당대 교회가 죄가 없는 국민을 타깃으로 정한 채 수사하여 그 삶을 망치고, 그저 이녜스 하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을 그토록 괴롭게 하여왔다는 사실 또한 비판한다. 그러나 마땅히 그 국민들의 어버이여야 할 전제군주정의 군주는 여흥에 빠져 국정을 모른 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직은 죄다 루이자의 눈에 든 이들에게 돌아가고, 그녀의 불륜상대, 즉 정부에 불과한 이가 일약 총리대신까지 오르는 등 국정운영이 망가지기에 이른다. 스페인의 민중이 일어서 국왕 일가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건 당연하고 자연스런 귀결이라 하겠다.
시대는 결코 민중의 편이 아니었다. 카를로스 4세가 권좌에서 끌려 내려온 걸 기화로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에 진주했으니 말이다. 카를로스 4세, 또 그 아내가 임명한 총리대신 고도이는 제 국민보다도 옆나라 프랑스를 챙겼고, 결코 내주어선 안 될 실권까지도 어처구니 없이 허락했다. 그로부터 스페인은 불운한 전쟁에 거듭 참전해야 했고, 젊은 남성들은 무고한 피를 의미 없는 전장에서 흘려야만 했다. 국가의 몰락에 책임 있는 자에 대하여 민중의 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결과는 너무나도 컸다.
오늘의 스페인이 있기까지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곡절, 즉 공산주의의 무리한 발호와 오랜 군부독재, 극단적 정쟁 등이 왜곡된 역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해 보인다. 한 명의 어리석은 국왕이, 또 권좌를 탐낸 무도한 왕비가 강대한 국가를 망치는 게 이러했다. 그와 같은 불행이 어디 대륙 반대편 이베리아 반도에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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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강대국 스페인의 몰락, 권좌 탐낸 그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