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에 방송된 tvN 주말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최고시청률 21.68%를 기록하며 작년 <눈물의 여왕>(24.85%)이 방영되기 전까지 역대 케이블 드라마 시청률 1위 자리를 지켰다(닐슨코리아 시청률 기준). <사랑의 불시착>은 재벌2세 패션업계 사장 윤세리(손예진 분)가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북한에 불시착 하면서 북한군 장교 리정혁(현빈 분)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은 로맨틱 코미디다.
<사랑의 불시착>에서는 메인 스토리의 주인공 손예진과 현빈 못지 않게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감초 캐릭터들이 있었다. 바로 리정혁이 이끄는 민경대대 5중대의 북한군 부대원 4인방이었다. 개그담당 표치수(양경원 분)와 비주얼 담당 박광범(이신영 분), 귀여운 막내 금은동(탕준상 분) 등 다른 캐릭터들도 매력적이었지만 유수빈이 연기했던 '드라마 덕후' 김주먹은 독보적인 개성의 캐릭터였다.
윤세리가 북한으로 왔던 시점을 기준으로 김주먹이 빠져 있던 드라마는 <천국의 계단>이었다. 이에 윤세리는 부대원들이 한국에 왔을 때 김주먹과 최지우의 만남을 성사시켜줬다. 그리고 김주먹이 <천국의 계단> 못지 않게 좋아해 PC방에서 정주행을 하며 오열했던 드라마가 있었다. 종영 1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퓨전사극의 수작으로 회자되고 있는 장혁과 이다해, 오지호 주연의 <추노>였다.
▲<추노>는 1회부터 마지막회까지 방영 기간 내내 20%가 넘는 시청률을 유지했다.
<추노> 홈페이지
장혁의 연기 인생은 <추노> 전후로 나뉜다
1997년 SBS 드라마 <모델>로 데뷔한 장혁은 영화 <짱>과 드라마 <학교>, 지오디의 뮤직비디오 <어머님께> 등에 출연하며 조용하고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를 주로 연기했다. '리틀 정우성'으로 불리며 대중들의 주목을 받은 장혁은 2000년 'TJ Project'라는 활동명으로 음반을 발표해 밀레니엄 시대의 대표적인 '숨어서 듣는 명곡'으로 꼽히는 노래 < Gey Girl >로 활동하기도 했다(물론 큰 성공은 하지 못했다).
2002년 장나라와 함께 출연한 <명랑소녀 성공기>를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장혁은 영화 <영어완전정복>,<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에 출연하며 스타 배우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장혁은 2004년 10월에 터진 '연예계 및 체육계 병역비리사건'에 연루되면서 그 해 11월 현역으로 입대했다.
하지만 장혁은 군복무를 마친 후 2007년 드라마 <고맙습니다>에 출연해 인간적이고 진솔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2008년 SBS 드라마 <불한당>과 <타짜>에 출연하며 다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 장혁은 2010년 인생작이라 할 수 있는 <추노>를 만났다. <추노>에서 추노패의 대장 이대길 역을 맡아 엄청난 열연을 선보인 장혁은 그 해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1년 또 하나의 대작 사극 <뿌리 깊은 나무>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장혁은 2013년 훗날 <서울의 봄>을 연출하는 김성수 감독의 <감기>에 출연했다. 장혁은 같은 해 6월부터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에 고정 출연했는데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액션 배우다운 날렵한 동작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진짜 사나이>는 장혁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장혁은 <운명처럼 널 사랑해>와 <기름진 멜로> 같은 로맨틱 코미디부터 <뷰티풀 마인드> 같은 휴먼 의학드라마, <보이스> 같은 장르물까지 다양한 작품을 넘나들며 몰입도가 뛰어난 배우임을 입증했다. 장혁은 장나라와 깊은 인연이 있는데 2002년 <명랑소녀 성공기>를 시작으로 2014년 <운명처럼 널 사랑해>,<드라마 페스티벌-오래된 안녕>,2023년 <패밀리>까지 무려 네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다.
'실시간 드라마'의 한계? <추노>엔 없었다
▲강렬한 남성캐릭터의 상징이었던 이대길의 눈가 흉터는 <여명의 눈동자> 최대치 캐릭터를 오마주한 것이다.
KBS 화면캡처
<추노>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역시 주인공 이대길을 연기한 장혁이었다. 장혁은 수 년 간 수련했던 절권도를 비롯해 극 중에 등장하는 많은 액션 연기를 대역 없이 소화했을 뿐 아니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이대길의 감정선을 잘 표현하며 시청자들의 극찬을 받았다. <추노>에서 워낙 발군의 연기를 보여주는 바람에 장혁은 출연하는 사극마다 '이대길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근엔 사전 제작 드라마가 대세가 됐지만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그날 촬영해 그날 방송되는 '실시간 드라마'가 적지 않았다. 방영 시간에 쫓겨 촬영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완성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데 2009년부터 촬영을 시작한 <추노> 역시 중반 이후 사전 제작 분량이 모두 소진됐다. 하지만 <추노>는 마지막회까지 예고가 나가는 등 끝까지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잘 마무리했다.
<추노>는 OST도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임재범의 <낙인>과 글루미 써티스의 <바꿔>는 현재까지도 여러 예능에서 배경 음악으로 사용할 정도로 유명하고 MC스나이퍼가 부른 <민초의 난>도 힙합을 사극에 잘 녹여낸 곡이다. 특히 <바꿔>는 예능에서 전주 부분을 많이 사용해 연주곡으로 알려졌는데 2020년 <슈가맨3>에서 글루미 써티스의 보컬 신용남이 출연해 완곡을 부르며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주인공 능가했던 천지호의 미친 존재감
▲천지호는 성동일의 개성 있는 연기와 만나 <추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 중 하나로 거듭났다.KBS 화면캡처
이다해가 연기했던 <추노>의 히로인 김혜원은 '언년이'로 불리던 이대길 집안의 노비였지만 오빠와 함께 노비낙인을 지지고 새로운 이름과 양반 신분을 얻었다. 김혜원은 미인 캐릭터인 데다가 이대길의 회상 속에서 언제나 아리따운 화보처럼 등장해 이질감을 줬다. 또한 본의 아니게 자주 곤경에 빠지면서 대길과 송태하(오지호 분)를 고생 시킨 '민폐 캐릭터'이기도 했다.
명품배우 성동일은 <추노>에서 이대길을 추노꾼으로 키웠고 노비들에게 '악귀'로 불리는 악명 높은 추노꾼 천지호를 연기했다. 자신에게서 독립한 대길과 갈등을 일으키지만 자신을 따르는 패거리에게는 둘도 없이 좋은 형님이자 두목이다. 천지호는 동생들이 몰살 당했을 때 "은혜는 못 갚아도 원수는 꼭 갚는 게 이 천지호야"라며 복수를 다짐하지만 대길을 구하다가 화살에 맞고 생을 마감했다.
영화 <타짜>에서 마포대교의 안정성을 신뢰하는 '순정 있는 깡패' 곽철용을 연기했던 김응수는 <추노>에서 황철웅(이종혁 분)의 장인이자 극 중 최고의 악역 이경식 역을 맡았다. 결국 이경식은 평소 사람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았던 노비 업복(공형진 분)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댄스그룹 데믹스 출신으로 <해바라기>에서 태식(김래원 분)을 유난히 무서워하던 창무 역을 맡았던 한정수는 <추노>에서 대길이 패거리의 '넘버2' 최장군을 연기했다.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무예에 뛰어날 뿐 아니라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으로 사실상 무리의 리더 역할을 했다(실제 이대길 패거리 중 나이도 가장 많다). 최장군은 대길이 사둔 땅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 장면으로 드라마의 엔딩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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