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덕이(임지연 분)와 함께 JTBC <옥씨부인전> 스토리를 이끄는 송서인(추영우 분)은 대중에게 책 내용을 들려주는 전기수(傳奇叟)다. 천승휘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그는 이 분야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예술인이다.

지난달 21일 방영된 제5회에서는 북과 꽹과리 소리가 울려퍼지는 공연장에서 그가 팬사인회를 여는 장면이 있었다. 어린 여성들이 공연의 소재가 된 책을 가슴에 품거나 선물꾸러미를 들고 송서인 앞에 줄을 서 있는 장면이었다.

기이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송서인은 이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사대부 가문의 자제다. 그는 자신이 첩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집을 나와 전기수의 삶을 개척했다. 그는 책 내용을 구두로 들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책을 쓰기도 하고 연기도 하고 공연단도 이끈다.

조선 후기 대중적 인기 끈 전기수

 JTBC <옥씨부인전> 관련 이미지.
JTBC <옥씨부인전> 관련 이미지.JTBC

드라마 속의 송서인 같은 전기수들은 도서 문화에 대한 수요가 커지던 조선 후기에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주도하던 문화 현상이 임진왜란(1592~1598)을 계기로 일반 대중이 적극 참여하는 양상으로 바뀌면서 이 직업이 인기를 끌게 됐다.

기록만 놓고 보면, 드라마 속의 송서인보다 훨씬 실감 나게 대중의 귀를 사로잡은 실제 전기수가 있었다. 이 전기수의 사연은 정조 임금(재위 1776~1800)도 잘 알고 있었다. 정조가 그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살인사건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형사사건에서는 임금이 최종 재판을 맡았다.

정조가 전기수를 언급하는 장면은 실학자인 청장관(靑莊館)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아정유고(雅亭遺稿) 편에 나온다. 전라도 장흥군에 사는 신여척(申汝倜)이 같은 동네 주민인 김순창(金順昌)을 살해한 사건을 정조가 판결하는 대목을 다룬 글에서 그 장면이 확인된다.

김순창은 병든 동생 김순남이 자기 집 보리 2되를 훔쳐갔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채로 병든 동생의 머리를 절구통으로 내리쳤다. 신여척은 이 사연을 듣고 "순창은 사람이 아니다"라며 김순창을 찾아가 꾸짖었다. 김순창이 신여척의 말을 무시하자 몸싸움이 생겼고 이 와중에 김순창은 사망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신여척은 1789년에 체포됐다.

정조는 신여척의 행동은 의리를 위한 행동이라며 그를 석방했다. 그러면서 신여척의 행동과 거리가 먼 사례를 예시했다. 이때 거론된 사례가 한양 종로거리에서 야사를 읽어주던 어느 전기수의 피살이다. <청장관전서>에 따르면, 정조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한 남자가 종로거리 담배가게에서 패사(稗史) 읽어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영웅이 크게 실의하는 대목에 이르자 갑자기 눈이 찢어질 듯하고 거품을 품어내다가 담배 써는 칼을 들어 역사 읽어주는 사람을 쳐서 그 자리에서 쓰러트렸다. 대체로 보면, 맹랑한 죽음도 왕왕 있다."

정조가 '맹랑한 죽음'으로 표현한 이 사건의 희생자는 행인들에게 야사 형태의 패관소설인 <임경업전>의 내용을 들려주고 있었다. 이 전기수는 인조정권 실세인 김자점의 무고로 임경업 장군이 목숨을 잃는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러다가 관객의 공격을 받고 즉사했다.

흥분한 관객은 눈이 커지고 입으로 거품을 품어내다가 담배 써는 칼을 집어 전기수를 쓰러트렸다. 청중을 과몰입 상태로 몰아넣을 만큼 전기수의 구연 연기가 실감나게 진행됐던 듯하다. 대중이 전기수들의 이야기에 심취되곤 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조선 후기 시인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은 민중의 삶을 생기발랄하게 묘사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헌종 때인 1844년에 82세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한 이색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그의 문집인 <추재집>에도 전기수들의 활동을 알려주는 대목이 나온다.

<추재집>에 따르면, 당시의 전기수들이 주로 읽어준 책은 <심청전>·<숙향전>·<설인귀전>과 <소대성전(蘇大成傳)> 등이다. 작가와 연대를 알 수 없는 <소대성전>은 명나라 병부상서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난 소대성이 어려서 부모를 잃고 걸식과 품팔이로 연명하다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해 제후가 된다는 소설이다. 지금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영웅의 고난과 승리에 관한 이 같은 스토리도 전기수들의 주요 이야깃거리였다.

<추재집>은 전기수들이 관객을 찾아 무대를 자주 옮겼다고 말한다. 한양의 경우에는, 청계천 다리, 배오개, 교동(경운동), 인사동, 종각이 이들의 주요 공연장이었다고 한다.

고전소설 인기에도 한 몫

 JTBC <옥씨부인전> 관련 이미지.
JTBC <옥씨부인전> 관련 이미지.JTBC

전기수들은 흥미진진하게 구연을 이어나가다가 결정적 순간에 입을 꽉 다물곤 했다. 이들은 관객들이 답답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눈치를 챈 관객들이 돈을 내기 시작할 때까지 이 기다림은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강연료를 요구하는 방식이 <추재집>에는 요전법(邀錢法)으로 표현돼 있다.

<심청전> 같은 고전소설들이 오늘날까지도 인기를 유지하는 데는 전기수들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오늘날의 TV나 라디오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무대 장치도 없이 때로는 1인 다역을 소화해내며 소설 내용을 대중의 머리에 깊이 각인시켰다. 대중이 오늘날까지도 <심청전> 등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그들이 인상적인 방법으로 이야기를 전달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양반 사대부들이 기록한 현존하는 역사는 드라마 속의 송서인 같은 전기수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이룩한 문화 전달자로서의 공로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옥씨부인전 전기수 조선후기문화 청장관전서 추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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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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