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거장 감독 데이비드 린치 별세
미국의 거장 감독 데이비드 린치 별세 연합뉴스 AP

한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영화, 특히 특정 팬층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컬트영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는 법이 없는 명감독 데이비드 린치가 투병 끝에 16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

처음 개봉 당시엔 주목받지 못했던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가 심야상영을 통해 차츰 입소문을 타며 장기상영된 끝에 명성을 얻었고, 차기작 <엘리펀트 맨>을 통해 독자적 스타일을 가진 명감독의 탄생을 알렸다. 정점은 1986년 제작된 영화 <블루 벨벳>, 오늘의 린치를 이야기할 때 빠지는 법이 없는 독특한 작품이다.

이후 <광란의 사랑>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트윈 픽스>로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다시 <멀혼랜드 드라이브>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반대편에서 미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호불호가 엇갈리는 컬트영화 감독으로 생애 전부를 살아낸 그는 각본과 연출은 물론, 연기와 제작 일선에서 꾸준히 활약하며 미국영화, 나아가 문화예술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데 공헌했다.

독특한 로드무비

스트레이트 스토리 스틸컷
스트레이트 스토리스틸컷블루필름웍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는 린치가 아니라면 비슷한 작품조차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특별함이 있다. 장르에 갇히고, 전형성을 그대로 답습하는 수많은 현대 영화 사이에서 전에 없던 영화를 만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작가라는 점에서 린치는 영화 팬에게 귀할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 가운데 그래도 대중성이 가장 있는 영화를 꼽으라면 나는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꼽겠다. 1999년 유럽영화아카데미가 비유럽권 영화에 시상하는 비유럽영화상을 받기도 한 이 영화는 예술성 있는 작품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색다른 울림을 주는 독특한 영화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야기는 신문에 실린 실화로부터 출발했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이야기로, 멀리 사는 형을 찾아 트랙터를 타고 떠난 노인의 사연을 영화화했다. 주인공은 앨빈(리처드 판스워스 분)이란 이름의 70대 노인, 다리도 불편하고 지병까지 있는 그가 말더듬이 딸(씨씨 스페이섹 분)과 함께 둘이서 산다. 그에겐 형 라일(해리 딘 스탠튼 분)이 있는데, 사소한 말다툼 끝에 멀어져서는 서로 10년째 연락을 않고 있는 사이다.

10년째 연 끊고 지낸 형을 향해

그러던 어느 날 라일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그에게 전해진다. 이대로면 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일, 앨빈은 그를 찾아 떠날 계획에 착수한다. 운전할 줄도 모르고 수중에 가진 돈도 얼마 없는 그다. 앨빈은 머리를 굴린 끝에 집에 있는 잔디깎이 트랙터에 짐칸을 달아서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잔디깎이 트랙터가 어디 운송용으로 만들어졌겠나. 시속 5마일, 그러니까 10km/h도 되지 않는 느린 걸음으로 아이오와에서 위스콘신까지 380km가 넘는 대장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무려 6주가 넘게 걸리는 결코 긴박하지 않은 여정을 영화는 더없이 영화 같지 않은 방식으로 잡아낸다.

과연 린치다운 영화다. 남들은 좀처럼 택하지 않을 이야기를, 남들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정을 떠난다는 점에서 로드무비지만, 그 여정은 통상적인 여행처럼 동적이지 않다. 느릿하게 삶을 돌아보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야기, 쓸쓸하면서도 은은하고 따뜻하지만 동시에 삶 전체를 관조하는 서늘한 인상을 던지는 작품이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그렇게 다시없을 로드무비가 되는 것이다.

시속 10km, 잔디깎이 기계를 타고

스트레이트 스토리 스틸컷
스트레이트 스토리스틸컷블루필름웍스

통상의 로드무비가 그러하듯, 긴 여정 가운데서 앨빈은 일상에서 만나지 못할 여러 경험과 마주한다. 가진 거라곤 짐칸에 실린 소시지와 기름, 장작들뿐, 노안에다 허리도 좋지 않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을 지닌 70대 노인의 여정 가운데 지나치는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영화는 진짜 평이한 여행처럼 과장하지 않고 포착해 내는 것이다.

그 긴 여정에서 앨빈은 집을 나온 10대 소녀를 지나치고, 자전거를 타고 아이오와를 횡단하는 사람들과 조우하며, 신경질적인 여성 운전자와 툭 하면 싸우는 자동차 수리공, 여유 넘치는 중년 부부 등과도 스쳐 간다. 그 가운데 앨빈은 마주한 사람들과 삶이며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조금씩 제 삶을 돌아본다.

안락한 집에서 언제나 같은 일상을 살면서도 굳이 돌아보지 않았던 형이란 존재를 그는 느리고 먼 길 위에서 새삼 발견한다. 앨빈이 형이 없는 곳에서 형을 찾는 모습은 우리가 관계와 삶을 마주하는 방식 또한 생각하도록 한다. 어쩌면 트랙터 위에서 380여 킬로미터의 거리를 내달리는 느릿한 여정이 유일한 가족이면서도 더없이 멀게 살았던 형과 또 제가 잃어버린 지난 시간을 향해 다가설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닌지를 이 영화가 일깨운다.

여정의 끝에서

스트레이트 스토리 스틸컷
스트레이트 스토리스틸컷블루필름웍스

그 먼 길을 건너 앨빈은 마침내 라일과 마주한다. 허름한 집 앞에 두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린치가 담담하게 찍어낸다. 라일이 제 집 앞에 세워진 잔디깎이 기계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조금씩 노인의 눈가가 젖어 들고 그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한참을 더 말이 없던 노인은 잔디깎를 가리키며 곁에 선 다른 노인, 제 동생 앨빈에게 묻는다.

"나를 보러 저걸 타고 여기까지 온 거니?"

앨빈이 답한다.

"그래 라일."

대단할 것도 극적인 영화적 장치 따위도 없는 이 수수한 만남이 마음을 뒤흔드는 건 정성을 들여 본질에 집중하며 치장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린치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탓일 테다. 여기에 더해 특별한 사건 없이 오롯이 카메라 앞에 앉아 저를 내보인 리처드 판스워스의 명연기가 작품을 보는 이에게 그 진심을 고스란히 전하기도 한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그렇게 세상에 다시없는 로드무비가 된다.

이제 린치는 생을 마치고 다음 장으로 건너간다. 그가 찍어낸 몽환적이고 참신하며 눈치 보지 않는 작품들을 떠올리면, 그가 어디선가 아주 느린 속도로 저만의 목적지로 다가가고 있을 것이란 상상도 든다. 린치라면 그런 상상 또한 반길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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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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