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죽은 자가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원치 않은 이별을 향한 안타까움이란 이중적 감정을 공유해 왔다. 당연히 이를 소재로 숱한 창작이 이뤄짐은 당연지사.

끊임없이 망자는 다양한 형태로 귀환하고, 남은 자들은 이 자연법칙을 위배한 상황에 전전긍긍한다. 되돌아온 죽은 자, 즉 '언데드'는 현대 대중문화 전반에 깃든 상징들, '흡혈귀'나 '좀비', '강시' 등으로 분화되어 상상력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 분화된다. 북유럽에서 찾아온 <언데드 다루는 법>은 그런 영향의 최신판이다.

사랑하던 이들이 무덤에서 돌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언데드 다루는 법"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언데드 다루는 법"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판씨네마㈜

북구의 땅 노르웨이에도 여름은 짧지만 무덥다. 요즘 들어 전기 누수와 합선이 잦아 그렇지 않아도 견디기 힘든 시기를 더욱 짜증 나게 만들던 참이다. 공공 서비스의 부실을 탓하며 여론의 성토가 벌어져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상황.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전이 수도 오슬로 전역에 발생한다. 다행히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사고 직후 불가사의한 사례가 속출한다. 단순한 전기공급 부실로 인한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사태다.

'말러'와 그의 딸 '안나'는 최근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손자이자 아들 '엘리아스'를 잃었다. 부녀는 원치 않은 이별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다. 그나마 말러는 슬픔 속에도 추스르려 노력하지만, 안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닌 모습이다. 허깨비처럼 공허한 눈빛을 한 안나는 직장에 출근해서도 멍한 표정이지만 그래도 사람들과 부대낄 때가 차라리 낫다. 살아갈 의지를 상실한 탓에 혼자 있으면 수시로 자살 충동을 느끼기에 근처에 사는 말러가 조석으로 딸의 집을 방문해 끼니를 챙기고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고심하는 처지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데이빗'은 아내 '에바'와 연애하듯 행복한 결혼생활 중이다. 반항적인 딸 '플로라'은 종종 속을 썩이지만, 아직 어린 아들 '키안'은 그저 천진난만하다. 그런 아들의 생일이 다가오는 터라 부부는 함께 선물을 고민한다. 데이빗은 생업인 공연을 위해, 에바는 아들의 선물을 위해 함께 외출하지만, 에바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공연을 마치고 병원으로 달려온 데이빗은 아내의 시신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초로의 나이인 '토라'는 반려자 '엘리자베트'의 장례식을 치른다. 너른 식장에는 그와 엘리자베트가 안치된 관 외엔 아무도 없이 쓸쓸할 뿐이다. 이제 혼자가 된 토라는 너른 집에서 고독함을 곱씹어야 한다. 유복한 환경이지만 황혼에 접어든 노부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정전이 지나간 직후, 말러는 느닷없이 밤중에 외출한다. 그가 도착한 장소는 손자가 묻힌 묘지다. 무엇에 홀린 듯 삽으로 관을 파낸 할아버지는 엘리아스가 비록 시체 상태 그대로이지만 숨을 쉬고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옮긴다. 데이빗은 병원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연락을 받고 급히 도착한다. 토라는 자신 외에 아무도 있을 턱 없는 집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하고 얼어붙는다. 그들이 최근에 상실한 소중한 이들이 되살아난 것이다. 재회의 기쁨에 벅차지만, 과연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과연 생전과 같은 인간인 걸까?

고전 공포문학의 원형을 21세기에 되살리는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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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다루는 법"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판씨네마㈜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는 1902년,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될 단편소설 '원숭이 손'을 발표한다. 수많은 버전으로 변형된 이 짧은 단편은 공포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전드' 반열에 오른 것은 물론, 영문학 단편 중에도 손꼽힐 지명도를 획득한다. 작가는 평생 수많은 작업을 남겼으나 어느 하나도 이 작품에 비견될 수 없었다. 아마 원작은 몰라도 이야기의 기본 원형은 많은 이들이 알 법하다. 이국에서 흘러온 불길한 부적에 3가지 소원을 빌자 아주 기괴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소원을 이뤄준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집세를 내기 위해 200파운드를 청한다. 원숭이 손은 알았다는 듯 스스로 움직인다. 직후 외동아들이 일하던 공장에서 기계에 빨려들어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사망 보상금은 200파운드다. 망연자실한 노부부는 장례를 치르고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다 문득 아직 소원이 남았다는 걸 깨닫고 두 번째로 아들을 돌아오게 해달라 빈다. 손이 다시 움직이고 한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죽은 자, 그것도 형체를 갈기갈기 찢긴 망자를 맞을 공포에 주인공은 아들을 무덤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마지막 소원을 빈다는 이야기다.

이 간결하지만 흡입력 강한 단편은 자체로도 무수한 변주를 낳았지만, 공포문학과 영화에 미친 파급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대표적으로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대중소설작가 스테판 킹의 소설과 동명의 영화로 유명한 '애완동물 공동묘지'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소중한 반려동물을 잃고 시체를 원주민 묘지에 두자 돌아온 걸 본 가족은 죽은 아이를 동일한 방법으로 되살리지만, 돌아온 아이는 생전과 뭔가 다르다.

'원숭이 손'의 후예들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수많은 변형에도 불구하고 원형질의 주제의식은 크게 훼손되지 않고 계승해 왔다. 운명을 인위적으로 거스르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후세계가 실재한다면 망자는 안식을 누리는 게 당연한 권리인데 산 자의 집착이 초래한 사태의 끝이 행복할 리 없다. 멀게는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가 맞이하던 운명처럼, 수천 년 동안 인류가 간직한 일종의 교훈인 셈이다.

남은 자들이 사랑하던 이들을 떠나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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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다루는 법"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판씨네마㈜

영화 속의 인물들 역시 동등한 딜레마에 봉착한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믿었던 소중한 이들이 돌아온 건 너무 기쁜 일이다. 비록 죽음을 맞이할 당시의 상처와 매장 직후 일어난 부패의 흔적은 어쩔 수 없지만, 사랑과 헌신으로 극복 가능해 보인다. 정성 기울여 상한 육신을 목욕시키고 다듬어준다. 퀭한 눈에는 안약을 넣고 말라비틀어진 피부도 손봐준다. 그까짓 거 화장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혹시 소중한 가족을 시체로 간주하고 공권력이 찾으러 올지 몰라 노심초사할 따름이다. 말러와 안나는 엘리아스를 데리고 멀리 외딴 섬으로 숨어든다. 토라는 어차피 아무도 찾지 않는 저택에서 마음 놓고 사랑하던 이와 한 침대에 눕는다. 데이빗 가족은 좀 사정이 다르다. 병원에 시신이 안치된 터라 의료진은 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주목하며 조사를 진행한다. 분명히 심장이 뛰고 숨을 쉬니 '부활'한 건 맞는데, 말을 하지 못하는 건 물론 신진대사도 생전과 비교해 너무 느리다. 마치 '좀비'처럼 준 가사상태 격이다. 데이빗은 엄마의 상황을 자녀에게 어찌 설명할지 고민에 빠진다.

세 가족은 처음의 기쁨도 잠시, 곧 고뇌하기 시작한다. 감정 표시나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부활한 망자와 상봉할 때는 행복했으나 앞으로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들을 보살피는 불편은 별 것 아니다. 그러나 껍데기만 같을 뿐인 이해 불가한 존재를 언제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 점점 그들은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되돌아온 자들이 그저 숨만 쉬는 건 아님을 종종 드러낸다. 분명히 감정 표시를 꺼내지만, 그 뜻을 산 자는 온전히 확인할 수 없다. 물론 이른 작별에 한을 품던 이들에게 돌아온 이들은 선물이 될 수 있지만, 막상 귀환한 죽은 자를 맞이할 사람이 없다면?

비슷한 유형의 창작물에선 대개 이런 '언데드' 설정을 사회적 은유나 장르적 법칙으로 소화한다. 하지만 <언데드 다루는 법>은 그런 확장성에 경도되는 대신, 보다 근원적 윤리와 가족애에 집중하고자 한다. 안식 대신에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으로 강제로 되돌아온 소중한 이들을 남은 이들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게 과연 진정한 애정일까? 어쩌면 그저 자기만족 혹은 과도한 욕망 아닐까?

북유럽 명품 판타지의 정수를 온전히 전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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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다루는 법"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판씨네마㈜

영화는 그런 경계선에 놓인 고약하고 난해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각자의 입장을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런 부류 소재에서 흔히 전제할 기묘한 스펙터클 대신 지극히 정적이고 체념 깃든 분위기 속에서 마치 신경을 긁듯 정교하게 배치되는 음악과 소리가 작품의 정조를 두려움과 슬픔이 결합한 기운으로 가득 채운다.

한국 관객에게 이 영화는 <렛 미 인>과 <경계선> 작가인 욘 린드크비스트가 원작은 물론 각본에 참여한 것으로 그 색채를 각인할 테다. 벰파이어, 트롤에 이어 좀비라는 초현실적 존재를 끌어들여 소외된 인간의 삶을 상징적으로 풀이한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슬픔과 상실 속에서도 일정한 선택을 감행해야 한다. 동일한 난제에 직면한 세 가족의 각기 다른 해법을 응시하며, '나라면 어찌할까?' 자문자답과 함께 지켜본다면, 천편일률적인 게임 캐릭터 소모와는 차원이 다른 깊은 감정의 진폭을 공유할 수 있을 테다.

<작품정보>

언데드 다루는 법
Handling the undead / Håndtering av udøde
2024|노르웨이|드라마/공포/미스터리
2025.01.22. 개봉|98분|15세 관람가
감독 테아 히비스텐달
출연 레나테 레인스베, 앤더스 다니엘슨 리, 바하르 파르스
원작 욘 A. 린드크비스트 《언데드 다루는 법》
수입/배급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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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다루는법 테아히비스텐달감독 욘린드크비스트 레나테레인스베 노르웨이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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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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