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뉴욕에 사는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는 딸과 아내를 둔 가장이다. 온라인 광고 대행 업무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가정과 일의 양립을 목표로 하는데, 매일 깨어 있느라 잠도 부족하다. 겉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지만 속으로는 두려움과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려 있다.
정신없이 일에 파묻혀 살던 중 그는 어릴 적 형제처럼 자라온 사촌 벤지(키에란 컬킨)와 할머니를 기리는 폴란드 패키지여행을 계획했다. 할머니는 유산으로 여행경비까지 내줬다. 벤지는 일정 마지막에 할머니가 살던 동네를 가자고 제안한다.
벤지는 데이비드와 정반대의 성격이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 기복을 가진 친구다. 한없이 처음 보는 사람과도 말이 통하는 친화력을 발휘하다가도 갑자기 돌변하면, 세상 우울한 사람이 된다. 조울증이 있으며 엄마 집 지하실에 얹혀사는 백수다.
그는 할머니를 생각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 정도로 극단적이다. 게다가 하고 싶은 말은 일단 던지고 보는 기분파다. 상대방의 기분과 상황은 안중에도 없고 불안한 시한폭탄 같다. 대신 사과하는 등 뒤 수습은 늘 데이비드의 몫이다.
이들의 여행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유대인 3세이자 미국인인 둘에게 폴란드는 가깝지만 낯선 나라다. 이들은 언어도 모르고 문화도 잘 모르기에 패키지 투어를 신청했다. 마치 관광객처럼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가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유대인 수용소로 가는 기차 안에서 돌연 주체하기 힘든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더니 일등석에서 제공되는 프리미엄 서비스가 불편하다며 꼬리 칸으로 간다. '80년 전 선조들은 화물칸의 가축 취급을 받으며 끌려갔을 텐데, (이 여행을) 남 일처럼 즐겨도 되는 건지' 망설인 끝에 내린 결정이다.
흐름을 끊는 벤지를 처음에는 모두 불편했지만 여행이 무르익을수록 조금씩 공감하게 된다. 아픈 역사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렇다고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체화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투어의 첫 번째 시작을 알리는 '게토 봉기 기념비'에서 벤지가 보여준 위트는 '진짜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그들의 희생에 진정한 위로를 건네는 색다른 방식이었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진지하고 결연한 동상 앞에서 동심으로 돌아간 듯 흉내 내는 즉석 연기는 내 이야기를 객관화하는 장치로 연결된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느라 소원했던 둘은 오랜만에 여행길에 오르며 잊고 지낸 기억을 차츰 떠올린다. 여행은 낯선 곳의 설렘과 불편함이 동반되는 일이지만 잃어버린 나를 찾고 인생의 후반전을 달려갈 용기를 얻게 되는 모순적인 일이다. 여행은 머물기 위해 떠나야만 하는 이중적인 행위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인생과도 같다. 철저하게 세운 계획도 어처구니없이 작은 일로 틀어지기 마련인 것처럼. 이쪽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뚫거나 좀 돌아가는 여정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과정인 셈이다.
슬픔을 공감하는 색다른 방법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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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여행의 설렘, 불편함을 거쳐 뜻밖의 난처함을 해결하고 익숙해질 때쯤 헤어져 아쉬움을 알아차린다. 돌아가는 내내, 혹은 일상에서도 여행은 휴식이자 치유, 영감의 원천이었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민족 전체의 트라우마인 역사를 개인의 역사와 나란히 한다. 전쟁과 분단 등 우리도 비슷한 아픔이 있기에 공감하기 쉽다. 몇 년 전 겨울, 서대문형무소를 탐방했던 기억이 <리얼 페인>을 보며 떠올랐다. 나라 잃은 설움, 독립과 광복을 위해 스러져갔던 선조들의 기개, 분노, 한을 이 공간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벤지만큼은 아니었지만 책이나 미디어로 배운 민족의 역사를 마치 내가 겪은 것 같았다. 도심과 가까운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일상과 가까운 서대문형무소의 거리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꼈다. 잠시 머물다 갈지언정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애도하는 방식이라는 걸 깨달은 기회였다.
타인의 상처를 공감하는 법을 영화에서 배웠는데, <리얼 페인>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긴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1세대 유대인은 허드렛일로 버텼다. 2세대 유대인은 힘든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키워준 부모덕에 전문직 종사자가 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3세대 유대인은 신세 한탄만 하며 부모 밑에서 안주하려는 장면들이 그렇다.
영화는 벤지가 마음의 병을 얻게 이유가 어떤 일이었을지 차분히 조명한다. 각자의 복잡한 속내를 진솔한 방식으로 전한다. 영화는 '네 고통을 공감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고통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던' 벤지가 비로소 자신을 보듬게 되는 시작을 응원해 달라고 한다.
가족사를 통해 민족 역사를 말하는 일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벌써 두 번째 영화를 선보인 제시 아이젠버그의 연출 능력은 연기를 했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은 안긴다. 영화 내내 흐르는 폴란드 출신인 쇼팽의 음악은 클래식의 잔잔하고 우아한 선율과 시너지를 이루며 극의 활력을 더한다. 키에란 컬킨과 제시 아이젠버그와 인연이 있던 엠마 스톤이 제작자로 변신한다.
영화는 분주한 공항 속에서 다양한 인종, 성격의 사람들을 지켜보며 안정을 취하는 벤지를 비추며 삶의 순환성과 연속성을 말한다. 별일 일어나지 않아도 마음 따뜻해지는 정서는 영화 <바튼 아카데미>를 떠올리게 한다.
제시 아이젠버그 가족의 역사를 소재로 만든 <리얼 페인>은 올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키에란 컬킨에 남우 주연상을 안겼다. 그 또한 <나 홀로 집에>로 데뷔해 불우한 가족사에도 배우로 성공했기에 가족을 다룬 이 영화가 남다르게 다가올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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