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로맨스 드라마에 '실장님'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여주인공 대부분은 '실장님'의 도움이 필요한 부하 직원인 경우가 많았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녀들은 일로 인해 부딪힌 난관, 혹은 인간관계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마다 '슈퍼맨'처럼 실장님이 짠 하고 나타나 문제를 해결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상황이 좀 바뀌었다. 실장님의 도움을 받던 여주인공들은 스스로 실장이 됐다. 최근 드라마에 직장 생활의 요직에 있거나, 전문직을 가지고 그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여전히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금토 드라마로 맞붙은 SBS의 <나의 완벽한 비서>와 MBC <모텔 캘리포니아> 이에 펼쳐지는 이야기가 그렇다.
비서가 필요한 여성 CEO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 중 한 장면.
SBS
창업 5년 만에 서치펌 피플즈를 업계 2위로 만든 강지윤(한지민 분)은 회사에 자신의 모든 걸 바쳤다. 직원들과의 회식 후 다시 회사로 갈 정도다. 그의 큰 아파트에는 텅 빈 냉장고가 있고 거실에는 소파 하나가 있을 뿐이다.
일중독 강지윤 대표는 자기 일에 있어서는 완벽하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게 서툴다. 직원들 이름도 못 외우고, 자신의 차도 헷갈린다. 쓰러져 병원에 갔더니 뇌가 과부하가 걸려 비명을 지르는 것이란다.
그때 천사처럼 나타난 남자가 서미애 남편의 친구 유은호(이준혁 분)다. 인사과 과장이었던 유은호는 딸을 위해 선택한 1년 간의 육아휴직을 쓴다.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서류 심부름도 마다하지 않고 버티려던 그를 회사는 누명을 씌워 내쫓는다. 심지어 동종 업계에는 발도 못 붙이게 했다. 가장으로서 울며 겨자 먹기로 '비서'직을 선택한 유은호. 자신의 맘에 들지 않아 수시로 비서를 갈아 치우던 강지윤은 유은호를 못마땅해 한다.
<나의 완벽한 비서>는 전통적인 로맨스 드라마의 화법을 뒤엎는다. 여주인공은 일만 아는 CEO고, 남주인공은 그녀의 비서다. 단지 직위만 바뀐 게 아니다. 여주인공은 동네 아이들과 농구 경기를 해도 지는 건 싫어한다. "돈값 못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고 당당히 밝히는 능력 우선주의자다.
유은호는 다르다. 그는 강지윤의 사무실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시들어 가는 화분과 꽃에 눈길을 준다. 싱글 대디인 유은호는 놀러 온 서미애가 감탄하듯 요리에 진심인 건 물론, 아이도 전문가 수준으로 돌본다. 어디 그 뿐일까. 사무실 정리정돈부터, 일정 관리, 일상생활 케어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것이 없이 말 그대로 완벽하게 해낸다.
비 오는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강지윤 대신 가방 안에서 아이가 쓰던 만화 캐릭터 우산을 꺼내든 유은호. 그는 자신의 어깨가 다 젖는 걸 마다하지 않고 강지윤에게 우산을 씌워준다. 그렇게 세상의 파도를 홀로 헤쳐나가는 강지윤에게 따뜻하게 마음의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이 된다. 강지윤이 떡볶이 하나를 먹어도 나무젓가락의 받침대를 만들어 주는 유은호에게 강지윤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영원한 내 편
▲모텔 캘리포니아MBC
<모텔 캘리포니아> 지강희(이세영 분)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캐릭터는 아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모텔에서 살며 엄마도 없던 자신을 놀리던 아이들에게 거침없던 인물이다. 그래서 지강희는 일찌기 동네 싸움 짱이 됐다.
이후 지강희는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천연수(나인우 분)네 장례식에 가기 위해 명품 백을 빌려야 하는,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고시원에서 사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거침없는 성격은 그대로다. 그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인데 임금이 체불되자 회사를 고발해 쫓겨났다. 그래서 이른바 노가다를 하는데 결코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현장에서 만난 황정구 이사(우미화 분)를 도와준 덕에 '모먼트'에 입사 기회를 얻었지만, 유학파까지 포진한 그곳 사람들의 갑질로 쫓겨날 처지에 놓인다. 이때도 지강희는 "내가 너(모먼트)를 아웃시키겠어"라며 그곳을 박차고 나온다. 심지어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싫은 사람하고는 일하지 않는 사치를 누리겠다"며 거절한다.
현실은 바닥이라도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한 그녀에게는 고향처럼 그리운 이가 있다. 곰 같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만 봐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냉큼 알아 봐주는 남자, 그녀가 그를 두고 홀로 서울로 떠나버려도 그 넓은 서울 바닥을 헤매 그녀를 찾는 남자, 그래서 결혼식장에서 당연히 그를 떠올리게 하는 남자 천연수다.
여장부 캐릭터와 다르게 드라마의 구성은 역설적으로 고전적이다. 성공을 위해 고향을 떠나온 주인공, 그녀를 지고지순하게 바라보는 남자 주인공, 심지어 야생 동물 같은 여주인공을 바라보는 남자 주인공의 직업은 수의사이다. 게다가 덤으로 전형적인 실장님 같은 재벌 2세 금석경(김태형 분)도 등장한다.
최근 시작한 드라마이기에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과연 거친 세상 속을 홀로 헤쳐나가는 여주인공 지강희에게 천연수는 어떤 따뜻한 위로의 파트너가 되어 줄까.
쌈닭 같은 두 여주인공과 그녀를 품어줄 따스한 두 남자, 동시간대 SBS와 MBC 로맨스 대결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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