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오랫동안 타자에게 귀속된 채 살아야 했다. 여성을 장신구처럼 취급하는 시대에 묶인 채 순종을 강요받았다.
여기, 한 여인은 왕과 맞서기로 결심했다. 국가를 다스리거나 권력을 쥐겠다는 목적은 아니었다. 단지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을 꿈꿨을 뿐인데 이를 이루려면 왕이 되거나 그와 대적할 정도는 되어야 했다.
반란자의 아내, 성군의 어머니, 불행했던 여인.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많지만, 모두 '남성에게 귀속된 여성'의 시각일 뿐이다. 이제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원경왕후에 관한 이야기다.
왕을 거부한 왕후, 조선을 열다
▲<원경왕후> 스틸컷tvN·티빙
tvN 오리지널 드라마 <원경> 속 원경은 고려가 비좁아 조선을 제창한 여성이다. 이를 위해 남편을 왕으로 만들었고, 형제들을 주요 인사로 앉혔다. 사내로 태어났다면 임금이 되었을 거란 아우의 말처럼 가진 배포로 보나, 꾀하는 계책을 보나 나라를 담아낼 그릇을 지녔다. 하지만 그는 여자로 태어나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었고, 그럼에도 꼿꼿하게 살아갈 방법은 있었다.
그는 거사를 앞두고 불안에 떠는 남편 이방원에게 "오늘 밤의 역사는 우리 편"이라 북돋우며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백성에게 증명하라"고 말한다(1화). 후궁이 낳은 자식까지 떠맡는 상황에서도 "왕자는 모두 중전인 나의 자식"이라며 "나는 대충 살지 않았다. 자식도 그리 가르치겠다"고 다짐한다(2화). 왕이 폐비를 운운하며 자신을 궁지에 몰자 "이 조정 안에서 피아의 구분이 명확하다고 자신할 수 있냐"며 역으로 묻는다(3화).
그의 기상은 이방원과 맞붙는 순간마다 거세어진다. 갑자기 나타난 자객에 왕이 얼어붙자, 단도를 꺼내 찌르고 왕을 불신하는 정국에 압도당할 때는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희생은 감당하자"고 독려한다. 반대로 이방원이 원경을 하대할 때는 "나는 당신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라며 눈을 맞추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용상에서 내려오라고 말한다.
특히 원경과 이방원의 갈등이 심화하자 그는 맹렬히 자존을 지키려 한다. 무예를 연습하는 원경을 두고 "조선의 여인은 칼 따위 들어서는 안 된다"고 이방원이 말하자, 그는 "예쁘게 분칠하고 무조건 따르고 복종하길 바라냐"며 그를 밀어낸다. 잠자리를 강제하면 거부하고, 점점 난폭해지는 이방원의 모습을 보며 '이럴 줄 알았다면 가문까지 동원해서 왕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원경이다.
원경은 배후에서 움직이는 인물이다. 정보원을 써서 왕보다 빠르게 첩자 소식을 손에 얻고, 태상왕이 벌이는 음모를 알아챈다. 또한 겉으로 나서서 행동하지 않고 주변 대신들을 조정하거나 왕에게 거절할 수 없는 청을 제안하며 협상하기도 한다. 여성으로서 성별 제약에 묶여 직접 행동하지는 못해도 여러 방면으로 자주적인 정신을 실현하는 그다. 감히 왕에게 거역할 수 없어도 그의 강요를 거절할 줄 아는 여성, 원경만이 지닌 주체성이다.
자기 '욕망' 에 집중한 원경
원경의 주체성에 매료될 즈음, 노출 장면이 도마 위에 올랐다. <원경>는 TV 편성인 tvN에서 15세 이상 시청 가능 등급으로 방영하고, 기존 플랫폼(티빙)에서 19세 미만 관람 불가로 공개하고 있다. 이에 불필요한 노출 장면이 공개되며 일각에서는 "원경의 주체성을 깎아내린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전에 공개된 티빙 오리지널 <우씨왕후>가 지나친 노출 장면으로 드라마의 정체성을 퇴색시켰던 것과 비슷하다는 의견이 뒤따랐다.
카메라로 여성 캐릭터의 몸을 적나라하게 훑고, 지나치게 신체 부위를 강조하는 등의 아쉬운 연출 방식은 <원경>에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집중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원경의 '욕망'이다.
1화에서 원경과 이방원이 즉흥적으로 첫날밤을 갖자 상궁들은 "전하가 편하실 수 있도록 집중하라"며 주의사항과 함께 "절대 쾌락으로 즐기지 말라"고 원경에게 당부한다. 조신한 아내이자 수동적인 여성의 위치를 알려주며 경고했지만, 원경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원경은 끝내 자신에게 집중했다. 그는 이방원의 감정을 신경 쓰는 대신에 "우리를 두고 물러가라"고 이르며 그 자신의 쾌락을 만끽한다.
4화에서도 원경은 '성관계를 거부'한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면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합궁을 강요하는 이방원과 상궁들을 향해 "내게 복종을 가르친다면 거부하겠다"고 침소를 떠난다. 감히 '왕'과의 합궁을 거부하는 여성, 원경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거절하는 여성으로 표현된다.
조선 태종의 왕비이자 세종의 어머니로 불린 원경왕후 민씨에게 숨결을 불어 넣은 드라마 <원경>. 드라마는 조선 여성들에 대해 주체적인 해석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남은 회차에서도 원경의 주체성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방원과의 애증 섞인 로맨스 속 '여주인공'이 아닌 제 자신으로 시대를 살려는 여성 원경이 담기길 바란다. 그렇게 또 하나의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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