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만세'가 어느덧 900회 차를 넘겼다. 그동안 여러 차례 독자의 메일이며 쪽지, 또 곳곳에 달린 댓글들을 마주했다. 제 멋대로의 감상을 말하는 이도 있고, 기사 중 어느 대목이 못마땅한 이도 있으며, 다음엔 이런 영화, 저런 이야기를 다뤄달라는 청탁도 있다. 나는 그 대부분을 무시해왔으나 근래 들어 조금은 태도를 달리할 필요를 느낀다.

그건 최근 몇 년 간 이 시리즈를 읽고 있다는 이들과 조우하는 일이 생겨난 탓이고, 그중에서도 감독이며 배우처럼 현업 영화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영향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중 어떤 이가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글의 세세한 대목을 내 눈앞에서 공들여 이야기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낯짝 두꺼운 나조차 부끄러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내 글에 쓰는 마음보다는 내가 글에 들이는 노력이며 애정이 더 커야 할 것인데 이따금은 그렇지 못하였던 것이 아닌지. 그로부터 글에 따르는 반응을 조금은 더 챙겨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오늘 다룰 영화 또한 그러한 경우다. 어느 영화를 다뤄달라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제가 참여한 작품을 이야기하고, 또 일부는 제가 볼 만한 작품인지를 봐달라고 하기도 하지만, 개중 가장 많은 경우를 말하자면 흘러간 옛 영화를 이야기해달란 쪽이다. 지나간 영화 이야기가 무어 그리 좋을까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때로 이야기하고픈 옛 영화가 적지는 않은 걸 보면 그들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는지. 기실 개봉작이란 언제나 명작이 될 약간의 작품과 시간의 세례를 결코 건너지 못할 대부분의 범작과 졸작이 섞여 있는 것이니. 추억 속의 영화가 대체로는 낫다 하겠다.

<이터널 선샤인>은 개중 다섯 번이나 다시 다뤄달란 요청이 있었던 작품이다. 요청이 잦기론 손가락으로 뽑을 정도인데, 최근 들어 메일과 댓글이 이어지는 걸 보면 아마도 겨울에 더욱 생각나는 때문이 아닐지. 물론 유행하는 재개봉을 어김없이 또 하고 있는 사골영화인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무튼 이 영화를 다뤄달라 요청하는 이가 많으므로 새해 들어 조금은 더 친절해지기로 한 나는 <이터널 선샤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터널 선샤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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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넌 사랑을 몰라"

내가 이 영화를 처음 안 건 십몇 년쯤 전이다. 개봉한 지 21년이 된 영화를 십몇 년 전에 알았다는 건 지나간 뒤에야 그 이름을 들었단 뜻이다. 이유는 이렇다. 나는 웬만하면 영화를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좀처럼 사랑이야기엔 손이 가지 않았다. 그건 스물대여섯이 되도록 여자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사랑 같은 대단한 무엇도 그저 호르몬의 장난이며 성적 욕구쯤으로 여겼던 탓이다. <이터널 선샤인>도 다를 것이 없어서,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을 좋아하는 편임에도 그렇고 그런 지나가는 영화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물며 그 촌스런 퍼렇고 뻘건 머리라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정말이지 촌스러웠다는 얘기다.

개봉한 지 몇 년이 흘러 한창 이런저런 잡지에 영화글을 청탁받고 있던 시절, 그러니까 몇 년만 더 흐르면 못해도 지금의 이동진이나 정성일 같은 자리에 가 있으리라 믿었던 때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들었다. 한 사람이 내가 영화글을 쓴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길 "너 <이터널 선샤인>이라고 알아?"라고 하였는데, 나는 도무지 그런 제목의 영화를 처음 듣는 것이었다. 아니 보았다고 말하자 그가 다시 말하기를 "어떻게 <이터널 선샤인>도 모르는 게 영화평을 쓸 수가 있어?" 하는 것이다. 나는 분개하여 대학교 도서관 꼭대기 층에 있던 멀티미디어실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그저 특이하고 되도 않는 이야기였달까. 다시 그를 만난 어느 날인가 이 영화가 내겐 영 아니었다고 말하였는데 그가 답하기를 "역시 넌 사랑을 몰라"라고.

그가 맞고 내가 틀리단 걸 안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정말이지 나는 이 영화를 보고 펑펑 울었다. 아니 어떻게 똑같은 영화가 한때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가 다른 때는 온 마음을 뒤집어엎는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전이라면 나는 믿지 않았을 터였다.

달라진 건 단 하나. 그렇다. 내게 이 영화를 소개한 이가 말한 대로 사랑을 몰랐던 나는 이 영화에 공명하지 않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은 나는 이 영화에 감전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경험으로부터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인간은 아무리 똑똑한 척 해봐야 겪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은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무엇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거다. 그 사랑이 끝났을 때조차.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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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특별하게 하는 것

그렇다면 무엇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가. 그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겠다. 이 영화에 대한 글을 후딱 써버리고 마찬가지로 다섯 표를 받은 영화 <타인의 삶>을 다뤄야 하니 말이다.

<이터널 선샤인>을 찍고 나서 아주 많은 이들이 감독 미셸 공드리가 세기의 천재라거나 거장이 될 재목이라고들 말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러나 이 영화에 한정해서 보자면 그의 특이하고 창의적인 스타일은 더없이 적절한 효과를 일으킨다. 이런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사랑의 상징과도 같은 날, 발렌타인 데이에 회사를 땡땡이치고 에라 모르겠다 기차를 탄 남자가 있다. 조엘 베리시(짐 캐리 분)가 바로 그로, 도착지인 몬토크 해변을 거닐다 요상한 성격의 파란 머리 여자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을 만나게 된다. 보자마자 그녀에게 홀리듯 빠져든 조엘은 여행 동안 그녀와 연인이 된다.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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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아도 충격적인 사라지는 기억의 시각화

그로부터 한동안 그녀와 사귀었던 듯, 영화는 몇 년 후로 훌쩍 넘어간다. 그런데 이 시점의 이야기가 가관이다. 몇 년 동안이나 사귀었는데 갑자기 클레멘타인이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그를 하소연하니 듣고 있던 친구가 갑자기 편지를 꺼내 '라쿠나'란 회사에서 그녀가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다. 조엘이 어찌 가만히 있을쏘냐. 저도 기억을 지워버리겠다고 그 회사로 달려간 것.

문제는 여기부터. 회사에서 보낸 이들이 기계를 연결해 조엘의 기억을 지우는 동안, 그 속에서 펼쳐지는 온갖 이야기가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지는 것이다. 누군가의 머릿속, 그것도 하드디스크 속 일부 구간의 데이터를 삭제하는 것처럼 지워지고 있는 기억의 모습을 영화가 연출하는 방식이 정말이지 다른 어느 작품에서도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펼쳐진다. 컴퓨터그래픽이 이토록 발전한 시대에도 감히 해내지 못할 방식을 무려 아날로그적 수법으로 해낸 미셸 공드리의 창의력과 추진력이 그가 제 영화인생의 정점을 지나고 있었음을 알도록 한다.

기억이 지워지는 동안 도서관 책들에 적힌 글씨가 사라지고, 색깔이 빠지는 모습으로 표현해내는 기발함, 뒷모습만 본 이를 기억 속에서 돌려세워도 그 앞모습이 없는 것처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표현력, 무엇보다 기억이 한창 지워지는 중간 기억을 지우지 않기 위해 사투하는 조엘의 모습을 지극히 현실적이며 시각적으로 포착한 점이 놀랍다. 그저 주변인인줄 알았던 조연들을 크고 작게 조엘의 삶이며 영화의 줄기와 엮어내는 솜씨도 기발하고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이터널 선샤인>의 가장 큰 힘은 영화를 보는 이의 기억이며 감정과 효과적으로 조응하는 구성에 있다. 사랑하고, 사랑을 잃고, 다시 그 사랑으로부터 초연해지려 애쓰다가 무참하게 실패해본 모든 이가 기억을 지우려다 온 힘을 다해 그를 지키려 드는 주인공 조엘의 모습에 공감하게 된다. 한때나마 제 삶 가운데 절절했을 사랑과 그 후폭풍을,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웠을 그 시간을 관객은 완전히 씻어낼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경험은 삶 속에 각인되고, 기억과 감정이 씻기어 나갈지라도 그 흔적만큼은 오래도록 남는 법이니까.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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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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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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