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장면
유경오
<벼개가 된 사나히>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여성국극의 시도를 모은 종합선물세트'다. 이를 위해 여성국극을 위해서 몇십 년간 명맥이 끊겨왔던 아쉬움을 해소하고자 여성국극제작소가 노력한 시도들이 작품의 곳곳에서 보인다.
첫째, 드라마 '정년이'로 주목받았지만 여성국극은 공연예술계에서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여기에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두 명의 제작진이 큰 힘을 발휘했다. 어쩌면 공연 이후의 느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고연옥 다운 입말과 서사 구조가 돋보였으며, 구자혜 다운 탈장르의 종합적인 연출기법이 정점을 찍었다."
동시대가 담긴 '실재'가 있지만 '신화적 서사'의 작법에 근본을 두고 있는 고연옥 극작가의 필법을 염탐할 수 있었다. 대사의 전달방식은 누구보다 간결하며, 정제된 문장을 군더더기 없이 전달한다. 객석에서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호와 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겠지만 핵심적인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함으로써 관객은 자신의 범위에서 재해석할 여지를 남겨둔다.
또한 구자혜 연출가는 전작들을 통해 소수자가 갖고 있는 환경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소수자와 약자가 관심을 받거나 소외되는 현상에 경계하는 작업을 주력했다. 또한 블랙리스트, 미투, 세월호, 코로나, 젠더 등 각 시대를 대변하는 동시대적 소재에 자신만의 연출기법으로 독자적인 색채를 입혔다. 혹자는 전통적인 연출 스타일에 반한다고 난색을 보이기도 하지만, 기존 연극에서 행하여왔던 장르적 문법을 재창조한다는 면에서 연출의 파급효과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둘째, 여성국극의 두드러진 특징이 120분의 공연을 통해서 정확하게 전달된다. 여성국극제작소의 출연진들을 비롯해 연극 창작진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모든 구성은 여성들이 맡았다. 이것은 여성국극만의 특징을 조금 더 정확하게, 세심하게 전달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보인다.
셋째, 무대 위에서 열연했던 배우들의 연기력과 여성국극스러운 노래창법이 남다르다. 특히 여성국극 1세대로 1960년대 이후 국민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이소자, 이미자 배우가 극중 왕자 역할에서는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특히 연극 공연 중 좀처럼 보기 힘든 이례적인 장면도 노출됐다. 두 국민배우가 몰입력 있는 창법으로 클라이맥스를 마쳤을 때 객석에서는 마치 커튼콜에 나오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원로배우에 대한 예우를 넘어서 여든과 아흔을 넘긴 두 배우가 젊은이 못지않은 창법으로 대극장을 채운 공연의 백미였다.
넷째,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세대와 장르 간에 혼재된 다양함은 연극의 꼭짓점을 장식한다. 앞서 필자는 연극의 한계로 국한되기 아쉽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극중 오케스트라 파트에서 다양한 악기들이 라이브로 연주되는 상황이 오페라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무대 위에선 연기와 노랫말이 혼재되어 극을 이끌어가는 점에서 '한국형 뮤지컬'이라 소개해도 손색이 없겠다.
다섯째, 대작을 만들기 위한 제작 스케일이 블록버스터 급이다. 이미 국민배우의 1세대인 이미자('왕자' 역), 이소자('유명한 왕자' 역) 선생을 기점으로 여성국극연구소의 대표이자 여성국극의 3세대에서 대표 주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박수빈 대표가 주인공 '소년'으로 출연한다. 이 밖에 여성국극제작소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황지영('공주' 역), 김미영('산미이' 역)뿐만 아니라 소리꾼 강다인('소녀' 역), 싱어송라이터 이주영('꼬마' 역) 등이 손을 잡았다. 이는 과거의 예술을 재현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공연예술계의 다양한 장르와 계층이 여성국극을 의하여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여섯째, 동시대성을 반영한 여성국극에 2025년의 시대상을 담았다. 여성국극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1960년대의 창법과 연기법에 토대를 이루었지만, 2025년 1월을 여는 이번 공연에서는 동시대가 요구하는 대중성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우선 대극장을 뒤덮기 위해 무대와 조명장치가 현란하게 활용됐다. 특히 뮤지컬의 방식을 차용한 부분은 '정년이'에 열광한 젊은 세대의 시각적 장치에 임팩트를 주기 충분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무대의 전환장치와 가장 밝고 화려한 조명은 대극장의 범위를 무대 안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때로는 무대 밖과 객석으로까지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일곱째, 모두가 공연에 다가갈 수 있는 '접근성'이 정점에 올랐다. '접근성'은 아마도 강량원 극장장이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의 예술감독을 맡으면서 가장 강조한 부분이 아닌가.
두 명의 수어 통역사가 전면에 배치된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자막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디테일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판소리의 강약과 늘어짐에 따른 창법에 발맞춰 일초의 흐트러짐도 허락하지 않는 정교함에 경의를 표한다. 이것은 관객과 배우가 호흡을 맞추는 마당놀이처럼 전통예술의 기본기에 빠져들기 위한 완벽한 환경이다. 동시대 연극을 보지만 예전 언어로 뒤덮인 대사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자막이 필수인데 그것을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흥에 빠져 노랫말을 따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예술의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올라서길 바라며
▲연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장면유경오
<벼개가 된 사나히>는 두 개의 막으로 구성됐다. 1막은 여성국극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년이 등장하는 '선화공주' 편이다. 여성국극단에 들어온 소년은 산마이, 니마이, 가다끼 등 여성국극의 전통적인 젠더 연기를 몸소 체험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다소 남성과 여성의 젠더역할을 뛰어넘어 성적인 묘사에서 지나침이 느껴지는 장면이 다소 보이지만 이 또한 여성국극의 리즈 시절을 재현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조치였을 것이다.
2막에서는 '아랑애사'라는 설화에 기본을 둔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고연옥 작가가 설화에 기반을 두고 만든 전작들이 남산예술센터, 두산아트센터 등에서 공연됐는데, 이번에도 그의 끈을 이어왔다. 여기엔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의 희생자인 아랑과 버들이 주요한 배역으로 등장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최근 몇 년간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원로배우들이 간담회나 토크쇼를 통해서 드러난 적은 있었지만 1세대의 배우들부터 3세대의 배우들까지 오직 여성국극을 바라보고 한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은 주목받아야 한다. 여성국극이 인기스타에 기댄 드라마 덕분에 일장춘몽으로 사라지지 않고,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문화예술계의 한 축으로 떠오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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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쓰고 있다. 문화예술 시사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에서 객원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있다. 현재는 '서울문화투데이' '더프리뷰' 등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