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모 바보> 스틸컷
보리수나무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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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다. 이 정도 하고 사는 것도"
관계 서사의 퇴적, 레이어의 오버랩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관계에서 발생한다. 영화의 직접적인 표현 바깥에 놓인 인물에게도 이는 통용된다. 영화가 시도하는 것은 그 자리를 외면하는 일이 아니라 건조한 시선으로 최소한의 표현을 통해 통과하는 일이다. 보통의 영화라면 기대되었을 일반적인 장면이 신과 신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기존의 숏이 가지는 문법을 허물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필요한 대사나 장면을 제외하고는 과감히 제거해 내고 있다는 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초반부에서 영진이 지각하던 순간의 장면과 진현의 집에 머물고 난 다음 함께 출근하던 날의 장면이 대표적인 오버랩에 속한다. 이후에도 진현이 근무하는 사무실 내에서 발생하는 몇 번의 장면은 서로 조금씩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장소와 대상'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하나의 자리에서 퇴적하며 관계의 서사를 완성한다. 여기에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지각을 이유로 영진과 진현이 치열하게 부딪히거나 이를 빌미로 한 부속의 사건이 전개되지 않고 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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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법을 해체하기만 했다면 그저 실험적인 영화로만 남았을 뿐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는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 위에서 유사한 장면의 변용을 통해 레이어를 쌓아가는 일은 필요조건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직접적인 설명을 지양하며 생략한 서사 일부를 편집의 측면에서 대체하는 것이다. 물론 앞서 밝혔듯이, 이것이 감독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 인물의 관계 또한 시간의 축적과 상황적 반복 속에서 관계성을 획득하고 이야기를 쌓아가는 부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모든 서사의 축적이 긍정적인 형태의 관계성이나 결말을 유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영화 <부모 바보>가 보여주는 가장 높은 수준의 현실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영진이 진현의 집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사람은 관계의 서사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각자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 털어놓게 되는 것은 물론, 퇴적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환경에 대해 이해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 속 모든 인물, 퇴적물 위의 모든 오늘이 그런 모습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영진은 아버지와 가까워질 수 없었고, 순례(나호숙 분)는 아들과 멀어졌다. 이들 사이에도 분명한 시간과 서사의 축적이 있었을 테지만, 그 퇴적층은 결국 균열과 함께 끊어져 버린 셈이다.
그런 비슷한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진현이 받게 되는 관계와 서사의 압력이다. 그동안의 어떤 장면에서도 의도적으로 결합되거나 유도되지 않고 병렬적으로만 놓여 있던 영화 속의 분절된 압력은 현관 앞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영진의 라면 부스러기 하나에 둑이 터지듯 한꺼번에 터져버리고 만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작품에서 해당 서사가 다음의 어떤 사건이 추동되는 발단이 되거나 구조상의 클라이맥스로 작용하는 것과는 그 쓰임이 다르다는 것이다. 서사의 진행이 아닌, 축적된 서사의 균열. 두 지점 각각에서 바라보는 이 작품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영화 <부모 바보> 스틸컷보리수나무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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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바보>라는 타이틀도 그렇고,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부모라는 역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들의 모습을 투영해 내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아무런 말도 없이 홀연히 자신의 자리를 떠나버리는 영진으로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새겨진 아버지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 같고, 진현에게서는 부모의 사정과 기대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세대의 표상이 느껴지는 듯하다. 제 멋대로 억지를 부리고 또 사과하던 순례는 또 어떤가. 대사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아들의 태도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이 작품 속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어디에도 없다. 계속해서 이야기했던 관계와 시간의 퇴적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리얼리티다.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으나, 영화 곳곳에 산재한 푸티지 영상에 마음이 쓰이는 것은 그래서다. 유일한 자유로움. 자유라는 단어가 영상 자체가 가진 에너지인지, 해당 영상을 촬영하던 누군가의 시선이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화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종류의 에너지에 해당하며, 영화가 런닝 타임을 통해 보여준 모든 장면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살아가는 일은 어딘가에 발을 붙인다는 뜻과 같고, 어딘가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말은 결국 자유로움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기에. 그렇게 보자면, 이 영화 속 작은 영상들은 모든 신과 컷, 레이어를 독립적으로 두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가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뒤집어 말하면,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방식에 의해 이 영화의 서사는 발생하고 묶이고 서로 간섭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단 700만 원의 예산으로 완성되었다는 점과 홍보 대행사도 없이 자체 배급을 통해 정식 상영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현실적인 측면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 영화라고는 하지만, 장편 영화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아니어서다. 하지만 들여다본 영화 속에는 그보다 더 대단한 경험이 존재한다. 이 작품만이 가지는 독특한 호흡과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현실과 닮은 이야기다. 분명 특별한 경험이다. 끝날 때까지 단정 지을 수 없게 만드는 힘과 지금껏 어느 작품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묘한 매력이 이 영화 <부모 바보>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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