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원경' 중 한 장면
tvN·티빙
처가의 영향력이 그 정도였기 때문에 이방원은 그쪽을 항상 주시하며 견제했다. 이런 모습이 드라마 <원경>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드라마 속의 이방원은 처남인 민무구(한승원 분) 및 민무질(김우담 분)의 발언과 행동을 세세히 체크한다. 또 중전 민씨의 기를 꺾고자 일부러 민씨의 시녀들을 가까이한다.
이방원은 부인 앞에서 자신이 나라의 지존임을 각인시키기도 한다. 제1회 방영분에서 갑자기 집무실로 들이닥쳐 "용상에서 내려오시지요"라며 자신의 허락도 없이 후궁을 들인 일을 따지는 원경을 그는 어이없이 쳐다본다. "저와 눈높이를 맞추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하는 원경 앞에서, 그는 일어서기만 하고 용상에서 내려오지는 않은 채로 "이래라저래라 이젠 이 용상에라도 앉고 싶은 겐가?"라고 대응한다.
"절 믿고 기다리셨어야죠"라고 힐난하는 원경에게 그는 코웃음을 친다. "기다리라? 임금에게 기다리라?"라는 말이 이방원의 입에서 나온다. 그런 뒤 도로 용상에 앉아 언쟁을 주고받던 이방원은 "이 나라에서 나는 왕이고 그대는 이제 나의 신하요"라며 선을 긋는다. 원경은 부부 간의 대화를 하자고 요구하고 이방원은 군신 관계를 명확히 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인 장면이다.
민씨 가문에 대한 이방원의 대응이 본격화된 것은 1407년이다. 전년도에 일어난 일종의 정치적 쇼인 양위 파동 때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보여준 언행들이 이것을 가능케 했다.
세자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자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혐의가 민씨 형제에게 떨어졌고,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실패한 이 형제는 귀양을 가고 죽음을 맞이했다. 민무구·민무질에 이어 민무휼·민무회도 시차를 두고 사약을 받았다. 그런 과정에서 원경왕후와 민씨 가문은 정치적 힘을 잃었다.
처가에 대한 이방원의 대응 방식은 가혹하고 잔혹했다. 인간적 도리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들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것은 정권을 지켜주는 기능을 함께 발휘했다. 왕후족의 발호를 억제하고 왕권을 보호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외척의 발호는 선비들의 주된 경계 대상이었다. 민씨 가문을 그대로 묵인했다면, 안 그래도 이방원을 싫어하는 선비들이 정권에 맞서 똘똘 뭉치기가 더 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의 대응은 민심 이반을 막는 기능도 수행했다.
이 대응은 민씨 가문이 가장 선호하는 왕자인 세자 이제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훗날 세자의 비행을 이유로 후계자 교체가 비교적 수월하게 이뤄진 데는 이 점도 작용했다. 이것이 세종대왕의 등장과 훈민정음 창제로도 연결됐으니, 리스크 처리가 우리 역사에 기여한 바는 한둘이 아니다.
처가의 권력 팽창에 대한 이방원의 견제는 패륜아 이미지로 정통성 위기에 빠진 그가 또 다른 정통성 문제에서 우위에 서게 만들었다. 왕족과 왕후족 중에서 정통성이 더 강한 쪽은 당연히 전자다. 외척의 발호를 견제하며 그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은 그가 정통성 있는 군주로 비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는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정통성 시비를 어느 정도 희석시키는 일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부인과 처가의 권력 팽창을 방치하지 않았다. 지나치지만 단호한 그의 대응은 왕족의 위상을 지켜주고 정권을 안정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민심 이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다.
▲드라마 '원경' 중 한 장면tvN·티빙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