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권력은 쥘 수는 있어도 내려놓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권력이 인간으로 하여금 집착과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천 년,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민주화된 이 나라 안에서조차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물러나는 지도자를 찾을 길 없다. 총칼로 집권한 군부독재가 헌법까지 바꿔가며 집착하는 것이 권력이고, 몇 년 되지 않는 집권 기간 동안 한 줌 남은 지지자조차 등 돌리게 한 무능한 정권이 내란을 꿈꾸도록 하는 것이 또한 권력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권력 앞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어느 지도자는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국가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지원했던 것이다. 그가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부탄의 5대 국왕이다. 그는 부탄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만들고자 행복정책을 펼쳤던 지그메 싱계 왕축의 아들로, 행복한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든다는 꿈을 2대에 걸쳐 마침내 이뤄냈다.

물론 지그메 싱계 왕축이 워낙 훌륭한 국왕으로 국민적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그와 그 아들의 민주화 시도가 장벽에 부닥친 것도 사실이다. 국왕이 국민을 일깨워 스스로를 통치하도록 하려 하고, 국민은 '당신 같은 지도자가 없다'며 그에 반대하는 웃지 못할 진풍경이 펼쳐졌을 정도. 그러나 지그메 싱계 왕축이 급작스레 아들에게 양위하고, 다시 그 아들마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민주주의를 알린 뒤 선거를 강행하니, 마침내 부탄은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민주주의 역사 가운데 국왕이 주도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그 삶과 정서를 안정되게 한 뒤 마침내 통치권을 이양한 믿기 힘든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부탄의 이야기는, 그러나 다른 나라에선 그저 해외토픽 단신 뉴스처럼 회자되어온 게 사실이다. 이는 국방력과 경제규모를 중심으로 뉴스의 중요성을 따지는 언론의 태도 때문으로, 우리는 부탄이 이룩한 위대한 변화에 대하여 깊이 알 수 있는 기회를 얼마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채택한 체제인 민주주의 역사 가운데 손꼽을 만큼 뜻깊은 사건이었음에도 말이다.

총을 든 스님 포스터
총을 든 스님포스터슈아픽처스

반가운 개봉, 부탄 민주화를 만나다

그런 의미에서 <총을 든 스님>의 국내 개봉은 반갑고 다행한 일이다. <교실 안의 야크>를 만들어 부탄영화를 세계에 알린 파우 초이닝 도르지의 신작으로, 부탄 민주화를 둘러싼 한바탕 소통을 유쾌하고 감동적으로 다뤘다.

영화의 시작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탄의 한 사원에서 큰스님(켈상 최제이 분)이 라디오로 뉴스를 듣고 있다. 국왕이 권력을 내려놓아 새로 지도자를 뽑는 선거를 시행한다는 이야기다. 방송을 한참 듣던 큰스님은 보좌인 수도승 타시(탄딘 왕추크 분)에게 총을 구해오라고 말한다. 그것도 두 자루나. 태어나 단 한 번도 총을 본 적이 없는 타시는 난감하지만 큰스님의 명이니 어쩌랴.

그로부터 타시는 온 마을을 나다니며 총을 수소문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 마을 어르신이 그 앞에 총 한 자루를 내려놓는 것이다. 오랫동안 창고에 들었던 구식 소총이라며, 오래 전 전쟁에서 많은 부탄인의 목숨을 앗아간 물건이라고 말이다. 기쁨에 젖어 타시는 총을 들고 수도원으로 귀환하는데, 웬걸, 외국인과 도시에서 온 젊은이가 저를 가로막는 것이다. 총을 주면 상상도 못할 만큼 큰 돈을 주겠다는데, 하필 타시는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큰스님이 내린 명을 수행했다는 기쁨 뿐.

총을 든 스님 스틸컷
총을 든 스님스틸컷슈아픽처스

큰 스님은 왜 총 두 자루가 필요하다 했을까

영화는 총 한 자루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요상한 소동을 보여준다. 큰 스님이 총을 어디에다 쓸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그 총을 지키려는 자와 구하려는 자 사이에 치열하고 간절한 거래가 오간다. 사실 타시에게 필요한 건 총일 뿐이지 '어떤 총'이 아니므로 그는 거래에 응하게 된다. 대신 대가로 오는 것도 총, 그것도 큰 스님이 구해오라는 총 두 자루를 안겨주는 조건이다.

그 총만 준다면야 어떤 총이든 다 구해주겠다는 제안에 TV에서 우연히 보았던 제임스 본드의 자동소총, 그러니까 'AK-47'을 고르는 타시. 전 세계 어디서나 널리 쓰이는 총이라곤 하지만, 군이 활용하는 대단한 화력의 살상무기가 아닌가. 그저 적당한 사냥용 라이플이나 권총 따위를 고르지 않을까 했던 이들이 당황하지만 타시는 여간 쇠고집이 아니다. 어쩌랴. 구해줄 밖에.

<총을 든 스님>은 총과 스님이란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으로부터 색다른 긴장감을 자아낸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날에 총을 가지고 할 일이 있다는 큰 스님과 그에게 순조롭게 도달하는 총과 탄약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하는 선거인력들이 혹시 모를 사건의 발발을 우려하게 하는 것이다.

총을 든 스님 스틸컷
총을 든 스님스틸컷슈아픽처스

민주주의의 양면성, 생각해본 적 있는가

영화는 총을 사려는 이들과 지키려는 이들 한 편으로, 부탄 시골마을에 내려와 선거를 준비하는 이들의 작업 또한 함께 담는다. 낙후된 시골마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시골사내가 있고, 그는 개발을 외치는 정당의 선거운동을 도우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변화를 원치 않는 이들이 대부분으로, 지금 이 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들의 대립이 그저 정치적 차이가 아닌 차별과 혐오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느슨하면서도 자연스레 드러내고 있다.

선거가 필요 없던 나라, 국왕이 선정을 펼치던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로 변환되는 과정을 영화는 과연 진보냐고 묻는다. 빨강과 파랑과 노랑으로 나누어 예비선거를 치르는 이들은 국왕의 상징색인 노란색을 택하고, 선거를 위해 해야 한다는 선거인 명부 등록 절차도 좀처럼 따르려 들지 않는다. 선거와 정치가 있어 좌우로 갈라져 서로를 적대시하는 갈등이 생겨나는 이색적 광경이 과연 행복한 삶과 더 나은 제도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지를 되물어 온다.

민주주의가 있어 한국에서의 삶은 행복한가. 민주주의가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가. 민주주의와 정치가 지켜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 그것이 망치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우리는 한 번이라도 깊고 자유롭게 생각해 보았는가. <총을 든 스님>이 그저 저 멀리 부탄이라는 작은 나라의 소동극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윤석열 당선과 내란, 나아가 좌우로 갈라져 부딪는 참담한 한국의 정치가 이 영화가 겨냥하는 바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총을 든 스님 스틸컷
총을 든 스님스틸컷슈아픽처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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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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