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고타> 스틸컷
플러스엠
꿈꾸는 사람이 미운 이유
국희는 다르다. 그에게는 언제나 목표가 있다. 보고타에 도착한 직후에는 돈을 벌어서 한국으로 금의환향하겠다고 다짐한다. 보고타에 적응한 후에는 박 병장을 보고 배우면서 6구역으로 이사 가겠다는 꿈을 꾼다. 6 구역에 들어선 후, 그는 새로운 꿈을 꾼다.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설령 손에 피를 묻힐 일이 생겨도, 그는 마다하지 않는다.
밀수금지법에 대한 갈등 국면에서 그들의 차이는 더 명확해진다. 국희에게 콜롬비아 정부의 새로운 밀수 금지 정책은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기회다. 그는 밀수금지법을 계기로 한인회 상가를 쇼핑몰로 탈바꿈시키려 한다. 반면 꿈꾸지 않고 목적도 잃은 없는 이들에게 밀수방지법은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다. 밀수를 통한 차익 없이는 사업을 지탱할 수 없어서다.
그들의 차이는 단순한 노선 갈등을 넘어서서 인간적인 감정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국희는 자기처럼, 또 자기와 함께 꿈을 꾸지 않는 수영과 박 병장에게 실망한다. 반대로 그들은 꿈을 향해 직진하는 국희가 자신들을 경멸한다고 느낀다. 수영은 국희에게 도리어 자기 꿈을 빼앗긴 것 같다고 믿는다. 박 병장은 국희가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도 모른다고 아니꼽게 생각한다.
<보고타>는 허무함의 정서로 가득하다. 국희는 친아버지보다 더 가족 같은 형, 삼촌과 함께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그를 배신했고, 국희는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해야만 했다.
허무함을 설명하지 못하는 허무함
허무한 분위기는 정작 영화 내에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허무함을 드러내려는 장치는 여럿 있다. 송중기의 내레이션이 대표적이다. 힘이 빠진 목소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차분하다 못해 체념한 듯하다. '마지막 기회의 땅'이라는 부제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다. 결말을 보고 나면 어조를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내레이션이 허무함의 정서를 처음부터 암시하나 게 아닌가 싶다. 노을 지는 하늘, 안개 낀 폭포와 같은 콜롬비아의 풍광을 담은 촬영도 마찬가지다.
다만, 정교하지 않은 화법은 이 장치들을 무력화한다. 국희가 박 병장, 수영과 대립하는 계기는 일차원적으로 묘사되는 식이다. 본래 그들의 대립은 두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보고타>는 제한된 분량 내에서 이야기를 풀려고 후자에 초점을 맞춘다. 그 결과 국희, 수영, 박 병장의 반목은 단순히 시기, 질투로 인한 분란처럼 보인다.
문제는 시기와 질투를 부각되는 후반부 전개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이다. 갑자기 시간대를 3년 후로 넘기다 보니 흐름이 한 차례 끊어진다. 자연히 국희의 서열이 수영과 박 병장보다 높아지고, 그들이 변화에 분노하는 상황에 몰입하기 어려워진다. 클라이맥스도 긴장감이 덜하다. 사소한 이유로 서로 목숨을 노리는 것처럼 보인다.
외골수인 국희의 선택도 작위적이다. 그는 자기 계획과 비전을 설득하는 대신, 힘으로 밀어붙이기만 한다. 이는 세 사람이 서로를 배신하는 광경을 연출하기 위한 억지 같다. 그 결과 종국에 국희를 사로잡은 씁쓸함, 고독함, 허무함을 관객 입장에서는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 <보고타>라는 작품 본연의 매력이 아예 지워진 꼴이다.
▲영화 <보고타> 스틸컷플러스엠
설명도, 포장도 안 되는...
허무함이 부각되지 않다 보니 영화의 끝에서는 여러 단점도 숨겨지지 않고 드러난다. 우선 기획 방향부터 어긋난 듯하다. 드라마에 더 적합해 보일 정도로 긴 서사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보고타>는 <수리남>을 연상시킨다. 남미라는 배경, 범죄 조직이라는 소재가 같을 뿐만 아니라, 전개 구조를 비롯해 등장인물까지도 대부분 대응되기 때문이다.
국희는 '강인구'(하정우)와, 박 병장은 '전요환'(황정민)과 같은 역할이다. 수영과 '작은 박사장'(박지환)은 '최창호'(박해수)와 '데이빗'(유연석)과 같은 기능을 한다. '박응수'(현봉식) 역시 근태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각성시킨다. 그런데 정작 영화 전체 분량은 <수리남>의 3분의 1 밖에 안 된다. 자연히 전개가 급하고 부실할 수밖에 없다. 각 인물이 변심하게 되는 동기나 계기를 관객에게 명확히 인지시킬 여유가 없는 까닭이다.
기시감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색이 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배우 개인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간 배우가 맡은 캐릭터의 집합체 같다는 인상을 떨칠 수 없으니까. 거칠게 말하자면 <보고타>는 <화란> 속 치건이 보고타로 이민을 와서, <로기완>의 주인공처럼 고생하다가,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도준처럼 눈부신 성공 끝에 인생무상을 느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평면적이고 새롭지 않은 국희의 캐릭터성은 일종의 도화지 같다. 이희준, 권해효, 박지환, 조현철 등 여러 배우들이 각자 개성을 보여주면서 앙상블을 이룰 수 있는 배경인 셈이다. 그러나 결코 장점은 아니다. 조연들의 서사를 급하게 건너뛴 대가로 전반적인 짜임새를 잃었기 때문이다. 결국 <보고타>는 장점도 무색하게 만드는 익숙함 속에 갇힌 채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종교학 및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영화와 드라마를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