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 스틸컷영화 <하얼빈> 스틸컷
영화 <하얼빈> 스틸컷
*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얼빈>의 유일한 대규모 액션인 '신아산 전투'는 묘하게 연출됐다. 냉병기의 시대는 지났지만, 몇 번의 총격이 오간 뒤에는 진흙밭에 뒹구며 육탄전을 벌인다. 눈과 흙, 피가 뒤섞인 치열한 전장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의 차이를 한눈에 살피기는 어렵다. 풍찬노숙하던 독립군의 처절함을 보여주는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아군과 적군 모두 전쟁의 희생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반전영화에서 더 익숙한 방식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안중근(현빈)은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풀어주자고 말한다.
이창섭(이동욱)을 비롯한 독립군의 반발이 따른다. 위치가 노출되어 반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전략적 판단과 함께 독립을 위해서라면 4천만 일본인을 다 죽일 수도 있다는 격한 감정들이 쏟아진다.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란 경고에 결국 안중근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만, 예상대로 일본군의 반격이 이어지고 독립군은 허무하게 궤멸당한다. 이어질 역사를 아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이때 안중근의 판단을 쉬이 존중하기는 어렵다. <하얼빈>은 극 중에서도, 바깥에서도 안중근을 구석에 몰아놓고 시작한다.
'나의 믿음으로 인해 많은 동지가 희생되었으니 더는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며 죽으려 했다는 안중근은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 아지트로 돌아온다.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그래서 왼쪽 약지를 잘라 혈서를 쓰며 다짐한다. 늙은 늑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이제 살아있는 안중근은 죽은 독립군의 일원이 됐다. 그래서일까. <하얼빈>은 독립군들을 어두컴컴한 배경에 두고 하나의 미약한 빛줄기로만 비춘다. 언제든 죽은 독립군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관객에게 주지시키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