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 라이카트, 미국 독립영화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지만 유독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를 지닌 감독이다. 물론 그의 영화는 영화제나 기획전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정식 개봉에 이르지 못하고 늘 '전설의 동물'처럼 언급되는 데 그치곤 했기 때문이다.

<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 <어떤 여자들>(2016) 등의 전작은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고 국내 주요 영화제에서 빠짐없이 소개됐지만, 감독의 명성에 비해 정작 개봉은 <퍼스트 카우>(2019)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2년여 넘게 지난 2021년 연말에 간신히 이룩한 결실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테이프를 끊은 감독의 차기작 <쇼잉 업>(2022) 또한 평단의 주목과 호평에도 불구하고 유독 국내 개봉은 더뎠다. 햇수로 3년 만에 겨우 늦깎이 개봉을 성사할 수 있었다. 감독의 작품 스타일이 '평양냉면'처럼 심심한 탓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국내 관객들이 상정하는 독립영화 이미지와 퍽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항상 극찬하며 지켜본다는 입소문처럼, 현재 미국 독립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감독의 작품엔 분명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법이다.

어느 지역 예술가의 정신 사나운 일주일 기록

 영화 <쇼잉 업> 스틸 이미지
영화 <쇼잉 업> 스틸 이미지엠엔엠인터내셔널㈜

사계절 뚜렷하고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는 예술가도 많다. 이런 지역 예술가 중 하나인 조각가 '리지'는 예술대학에 적을 두고 작업실에서 불철주야 도자기 인형을 제작하는 중이다. 며칠 후 오랜만에 중요한 개인 전시회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작가로서의 평가를 받기 위한 진검승부의 순간이 다가온다.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종일 집 지하실에 마련된 공방 작업실에서 찰흙으로 조심스럽게 인형을 만드는 것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사사건건 소소하지만 성가신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참이라 그렇다. 내용을 들어보면 별 것 아닌 듯해도 막상 본인 일이라면 귀찮고 짜증 나기 딱 좋은 것들이다. 지금 며칠째 보일러가 고장이 난 바람에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먼지와 흙을 뒤집어쓰고 전시회 준비에 열중하는 상태라 제대로 목욕을 하지 못하는 건 상상보다 무척 고통스럽다.

집주인이자 대학 동기, 게다가 같은 시기에 전시회를 앞둔 동료 '조'는 리지가 보일러 문제를 여러 차례 알려도 자기 일에 바쁜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 짜증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으로 몰리는 세입자 신세다. 조에게 집주인이면 제대로 책임을 지라며 을러대고 싶어도, 마음이 약해서인지 제대로 역정 한 번 부리지 못한다. 조는 급한 부탁은 잘만 하지만, 친구의 절박한 호소는 못 들은 척 외면하며 자기 전시회에만 골몰한다.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다.

가정사도 리지의 뒷골을 당기게 만든다. 가족이 모두 예술가 집안이다 보니 다들 한 개성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자기중심적인 행태로 일관하는 다른 식구들이 신경 쓰이다 보니 일이 통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가족으로 의무를 다하고자 신경을 쓸수록 스트레스받을 일만 늘어난다.

부모님은 별거 상태다. 작업에서 은퇴한 아버지는 자꾸만 불청객인 떠돌이 부부를 집에 초대해 보살핀다. 도움을 받는 처지라면 겸손해야 마땅하거늘, 마치 점령군처럼 아버지의 집을 마음대로 쓰는 이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리지다. 어머니는 같은 학교에 적을 둔 책임자이지만, 모녀 관계는 사무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오빠는 조울증을 앓아 제대로 사회생활을 않은 지 오래다. 종종 탁월한 천재성을 보여도 저렇게 불안정하면 도리가 없다.

그렇게 남들에게 대놓고 하소연하기도 곤란한 문제투성이 사이에서 리지는 묵묵히 창작에 애써야 한다. 방해 요소가 가득하지만, 그래도 작가의 예술혼을 이길 건 없다. 그렇게 하나둘 작품이 완성돼 간다. 제대로 샤워도 하지 못해 두드러기가 날 지경에 반려묘 '리키'는 놀아달라고 늘 보채고, 도자기 인형은 굽는 과정에서 변형되거나 예상한 대로 완성되지 못하기 일쑤다. 많은 게 걸린 전시회인데, 과연 순탄하게 준비를 완수할 수 있을까?

미국 독립영화 스타일을 압축한 특유의 작품세계

 영화 <쇼잉 업> 스틸 이미지
영화 <쇼잉 업> 스틸 이미지엠엔엠인터내셔널㈜

우리는 흔히 '독립영화'에 대해 정치·사회 관련 선명한 메시지를 전하거나, 혹은 풍자와 상징으로 어떤 주제의식을 은유하는 작업을 떠올린다. 군사 독재와 정치적 검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영화 운동'으로 출발한 한국 독립영화가 특히 '정치적 저항'과 '사회모순 고발'에 집중했던 과거가 인식에 일조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측면이 독립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독립영화라는 경계는 생각보다 광대하고 다양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폭넓게 합의되는 독립영화의 척도는 역시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일 테다. 미국의 경우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영화산업의 틈바구니에서 비켜난 영화들이 주로 대상이다. 상업적 흥행을, 그것도 전 세계 시장을 노리고 1억 달러는 가뿐히 넘기는 '블록버스터'와 차별화된 작품세계를 가진 영화들이다.

물론 기득권 체제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띠는 작품이 적지 않지만, 산업적으로 현실과 유리된 '환상'을 유포하는 할리우드 영화와 정반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일상성'으로 구현하려는 작업이 미국 독립영화의 색깔이라 보면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미국 독립영화(혹은 '인디' 영화)를 보고 있자면, 그저 무덤덤하게 일상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특징을 이해하고 나면 시시한 농담도, 쓸데없이 정교하게 묘사된 생활 속 풍경도 차츰 그 속에 빨려 들어가듯 친숙해지고 참견하고 싶어진다. 한번 맛을 들이고 나면 봄날 햇살 속에서 기분 좋게 차 한잔 곁들여 독서나 취미생활에 열중하다 문득 발견하는 낯선 새로움처럼 해당 부류의 영화를 즐기게 된다. 켈리 레이카트는 그런 미국 독립영화의 현시기 상징 같은 존재이며, <쇼잉 업>은 그 전형적인 모범사례에 속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이 영화는 감독의 출신 배경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영화 속 배경은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예술대학이다. 캘리포니아 북쪽 지방인 이 동네는 미국에서도 예술가가 많고 진보적인 사회문화 분위기로 정평이 난 곳이다. 그리고 감독 역시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본인의 영화 대부분이 오리건의 과거와 현재를 주요 배경으로 삼는다. 가장 익숙하고 자신 있는 소재를 세밀화 그리듯 작업한 셈이다. 게다가 오랜 무명생활을 이어가며 생계를 위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대학 강단에 섰던 이력 역시 진득하게 묻어 있다.

감독이 애착을 가진 자유분방하고 격식 따지지 않는 예술 풍토, 우리가 흔히 '예술가'라 하면 떠올리는 비현실적 '천재'보다는 바로 곁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는, 엉뚱하지만 자기 일에 매진하는 군상이 사실적으로 재현된 건 '등잔 밑을 놓치지 않은' 감독의 돋보기가 진가를 발휘한 덕분이다.

동료들 사이에 응당 형성될 수밖에 없는 질투심 섞인 경쟁심리는 리지와 조 사이에서 끊이지 않는다. 때론 얄밉게, 때론 치졸하게 그 각축은 계속된다. 우정과는 별개 문제다. 자기 전시회 준비가 절대적으로 시급하고, 동료의 전시회 준비현장을 몰래 염탐하거나 평론가의 호평에 목마른 면모 등이 너무나 섬세하게 그려지기에 피식 웃음이 나오곤 한다. 자연스럽게 표현되지만, 이런 묘사는 결코 쉽게 나올 리 없다.

'인간의 얼굴'을 한 현실의 예술가

 영화 <쇼잉 업> 스틸 이미지
영화 <쇼잉 업> 스틸 이미지엠엔엠인터내셔널㈜

리지는 만만찮은 재능을 가졌지만, 영화 속에서 종종 속물적인 면모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곤 한다. 반려묘가 집에 들어온 비둘기를 공격하자 화들짝 놀라 떼어놓지만, 날개를 다친 비둘기를 적극적으로 구조하거나 치료할 생각은 없다.

비둘기를 빗자루에 올려 창문 바깥으로 내보내며 '죽어도 나가서 죽었으면' 생각하는 풍경은 영화의 주인공 치고는 너무 하찮지만, 막상 우리 개별의 현실이라면 적극적으로 돌보라고 요구하기도 겸연쩍은 일이다. 그렇게 놀란 상태로 치워 버리고 안도하지만, 정작 다음날 얄미운 집주인 조가 자기가 구했다며 비둘기를 보여줄 때는 놀란 가슴 숨기느라 곤욕을 치른다.

이 지나갈 것 같던 소동은 주인공에 대해 관객이 재평가하게 만드는 중요 장치다. 외관상 리지는 새를 방관했고, 조는 그 새를 구조했다. 관객은 전지적 시점에서 이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죄의식 때문은 아니라도, 정작 구조한 새를 사려 깊게 돌보는 건 리지다. 전시회 핑계로 비둘기를 방관하는 친구 대신 병원에 데려가고, 보금자리를 꾸미고 걱정하는 건 늘 리지의 몫이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관심을 쏟은 비둘기의 운명이 왜 영화에 등장한 것인지 이유는 결정적 순간에 확인할 수 있다.

관객이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거나 관심이 많다면 이 영화 속에서 수준 높게 구현된 지역 예술가의 일상은 마치 거울처럼 다가올 테다. 천재성을 경주하며 남들은 모르는 비밀공간에서 뚝딱하고 도깨비방망이처럼 창작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 좀 별나긴 해도 우리 곁의 이웃이 시시콜콜한 일상 속에서 분투해 마음 졸이며 이룩한 결실과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잡무에 시달리는 풍경이 한가득 펼쳐지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미디어에서 크게 주목되지 않는 지역 예술가들이 처한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평단에 목을 매고, 동료와 경쟁이 일상이며, 먹고는 살아야 예술도 가능한 법이다. 그런 진득한 삶의 일상성이 누수 없이 전해진다.

어쩌면 주인공 인생에서 훗날 중요 분기점이 될 전시회는 만화경처럼 지역 예술가의 초상을 압축한다. 작품에 관심 없이 눈도장 찍으러 온 지인들, 전시보다 디저트에 눈이 팔린 관중들, 하지만 점잔 빼기보단 남녀노소 뒤섞이는 개방성이 더 돋보인다. 그중에 불쑥 끼어든 행운 같은 기회와 평가가 예술가를 춤추게 한다.

그렇게 <쇼잉 업>은 미국 북서부의 진보적 예술 토양, 지역 예술가가 사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삶 속에 자리한 예술의 성취를 응원하는 찬사로 향한다. 처음엔 무심코 화면을 쳐다보던 관객은 어느새 빙그레 웃으며 리지와 유쾌한 동료들을 응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테다.

 영화 <쇼잉 업> 포스터 이미지
영화 <쇼잉 업> 포스터 이미지엠엔엠인터내셔널㈜

[작품정보]

쇼잉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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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미국|코미디/드라마
2025.01.08. 개봉|107분|12세 관람가
감독 켈리 라이카트
출연 미셸 윌리엄스, 홍 차우, 존 마가로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쇼잉업 켈리레이카트 미셸윌리엄스 홍차우 존마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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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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