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당신을 배송합니다> 공연 장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장에 들어서면 물류회사의 서브터미널에 배치된 파란색 대형 철제카트가 여럿 놓여있다. 천장에선 물건을 배송할 때 사용되는 컨베이어 벨트가 곳곳을 장식한다. 음악감독 타무라 료의 비트에 맞춰 무대 한편에서 백주희 안무가가 쇼핑백을 들고 등장한다. 커다란 백 안에서 조그만 쪽지를 꺼내 읽는다.
"B구역 3열 14번, 아이들이 좋아하는 춤을 10초간 춰 주세요."
춤을 마친 안무가는 해당 구역에 앉은 관객에게 소정의 택배물품을 전달한다. 관객의 호기심을 자아낸 몇 번의 배송을 마치고 이번 작품인 <당신의 배송합니다>의 시작을 알린다. 한국 춤에 근간을 두었지만 동시대성과 연결고리를 이어온 이번 작품은 한국무용이지만 한국무용 같지 않은 다양성을 보여준다. 고유의 색채가 드리워진 배경음악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무대의 배경에는 배송기사의 피곤한 하루가 담긴 영상이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무용이 펼쳐진 장소는 얼핏 보아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물류회사의 음침한 현장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의지가 존재치 않아 보인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몸을 내맡긴다. 누군가에 이끌려 움직임을 반복하는 수동형의 인간상. 자신의 손짓이나 발짓조차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로봇처럼 보일뿐이다.
노동자 동작의 주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짧아진다. 노동자의 하루를 대변하는 무용수는 시간이 갈수록 가쁜 숨을 몰아쉰다. 피폐해짐으로 가득 찬 이곳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감옥과 같은 정적만 울린다. 점차 옥죄어오는 배경음악에 따라 공간의 조명도 하나의 빛에만 기대는 답답한 노동자의 현실을 대변한다.
무대에 등장한 여섯 명의 무용가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사이를 누리지 못한다. 단지 반복되는 물품의 배송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가학적인 짓누름은 배송의 끝마저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 현관의 엉켜진 호수의 배열은 배송하는 시간과 장소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하다.
이따금 배송에 지친 노동자는 온갖 상상할 수도 없는 고객의 민원에 시달린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재잘거림으로 정신이 사악해진 노동자들을 악의 구렁텅이에 몰아빠진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없는 육체적 시련을 넘어 정신적 고통의 끝판을 보여주는 배송 노동자의 열악함이 오롯이 전달된다.
<당신을 배송합니다>는 한국무용에 본질을 뒀지만 현대적 색채가 곳곳을 뒤덮었다. 막의 전환을 이루는 장면 사이에는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그가 직접 경험한 에피소드의 이미지들로 채워졌다.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내비게이션 목소리, 동일한 아파트의 비슷한 호수와 내려야 할 층수를 알려주는 엘리베이터의 소리, 차마 트럭이 이동할 수 없는 계단들로 가득한 좁은 비탈길을 사이에 두고 켜켜이 쌓아 올린 물품들. 이들을 움직이고 배송해야 하는 노동자는 잠시도 숨돌릴 틈 없이 때로는 육체적 노동의 모서리에서 아슬아슬할 뿐이다. 점점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자신의 한계를 초과한 노동자는 골목길의 계단에 쓰려져 무대는 암전한다.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을 한다고 더 무시해. 아무도 신경을 안 써."
영화 <다음 소희>의 대사처럼 작품 <당신을 배송합니다>는 배송노동자를 향한 우리의 인식과 사회적 시선에 질문을 던진다. 백주희 안무가는 "사람 존중의 가치는 어디서, 누구로부터 오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어떤 일을 하든 사회구성원으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이들은 그 자체로도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우리는 편견으로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을 평가하고 폄훼한다.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인간의 가치와 서로를 존중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사회적 이슈를 관객에게 던지다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소비가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지난해에는 국내 택배시장의 물동량이 무려 50억 개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언택트 소비가 일상화되면서 배송노동자의 수도 급증했지만 2000년부터는 단가 경쟁이 심화돼 택배 단가는 날이 갈수록 하락세를 면치 못한다. 이어서 배송 노동자의 과로사 소식이 연달아 전해지면서 이들의 열악한 근로환경에 대외에 알려졌다. 특히 택배물품의 분류작업이 이루어지는 서브터미널은 택배기사가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인데 화장실, 휴게실 등 인간다움을 위한 여건은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지난 2017년에 발표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근로환경조사'에 따르면, 서울시에 종사하는 택배기사들의 위험요소를 분석한 결과 중량물 취급과 반복적인 동작을 하는 육체적 위험보다 고객을 상대하는 정신적 위험이 더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고객의 갑질과 스트레스 등 정신적 위험에 취약하다는 뜻인데, 택배기사는 본사가 아니라 대리점(영업소)과 근무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개인사업자로 법적보호에서 제외되는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렇듯 무용예술의 장점은 우리의 사회 현상에 진지한 질문을 때로는 무게감 있거나 위트있게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백 안무가가 고민했던 다음의 질문에 관객들은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배송노동자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우리는 요청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지시를 내리고 있는가?"
"배송노동자를 사회 수직구조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배송노동자에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무용 <당신을 배송합니다> 포스터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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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다. 그동안 문화예술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2016~2023)에서 객원필진으로 글을 썼다. 현재는 대학로에서 공연과 전시를 보며 현장을 담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를 만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