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많은 역사 속 인물들 중 등장할 때마다 유난히 논란이 되는 인물도 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재선 국회의원 출신 배우 김을동의 아버지, 그리고 배우 송일국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정치깡패 출신 국회의원 김두한이 그 주인공이다. 실제로 김두한은 여러 대중 매체를 통해 그 어떤 역사 속 인물들보다 자주 등장한 바 있다.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시리즈는 일제시대 '조선 제일 주먹'으로 군림했던 김두한의 활약을 다뤘고 드라마 <왕초>는 주인공 김춘삼(차인표 분)의 친한 친구로 등장했다(실제로는 김두한이 김춘삼보다 10살 더 많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김두한의 이미지는 이 드라마로 정리됐다. 무려 124부작의 긴 호흡으로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렸던 김영철과 안재모 주연의 SBS 근대 사극 <야인시대>였다.

'신의 한 수'가 된 신예 안재모 캐스팅

 <야인시대>는 2명의 배우가 김두한을 연기하며 무려 1년 2개월 동안 인기리에 방영됐다.
<야인시대>는 2명의 배우가 김두한을 연기하며 무려 1년 2개월 동안 인기리에 방영됐다.<야인시대>홈페이지

1960년대 고 신상옥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던 고 장형일 감독은 1970년대 초 영화계를 떠나 KBS에 입사해 PD생활을 시작했다. 1988년 수목드라마 <훠어이 훠어이>를 통해 이환경 작가를 만난 장형일 감독은 1989년 정치깡패 고 유지광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무풍지대>를 히트 시키며 스타PD로 떠올랐다. 1996년 KBS에서 정년 퇴임한 장형일 PD는 SBS에서 드라마 제작 위원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장형일 감독과 <무풍지대>를 함께 만들었던 이환경 작가는 1996년 <용의 눈물>을 통해 스타 작가로 떠올랐고 2000년에는 레전드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을 집필했다. 그렇게 '사극 전문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이환경 작가는 2002년 장형일 감독과 13년 만에 의기투합해 정치깡패, 협객, 조선 제일 주먹 등 다양한 수식어로 불리는 김두한의 삶과 그 시절 사건들을 재조명하는 드라마 <야인시대>를 만들었다.

<야인시대>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김두한 역에 누구를 캐스팅하냐는 것이었다. 사실 이환경 작가의 전작 <태조 왕건>에서 궁예 역할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배우 김영철이 중년의 김두한에 캐스팅된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김영철 역시 궁예 이미지가 시청자들에게 워낙 깊이 각인돼 있어 연기 변신이 필요했던 시기였기에 김두한은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는 캐릭터였다.

문제는 이야기의 전반부를 이끌어 갈 청년 김두한이었다. 자칫 전반부에서 김두한 역의 배우가 시청자들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중년 김두한 역의 김영철이 아무리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해도 돌아선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형일 감독은 드라마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청년 김두한 역에 신예에 가까웠던 안재모를 캐스팅했다.

1996년 <신세대 보고-어른들은 몰라요>로 데뷔한 안재모는 <용의 눈물>에서 세종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왕과 비>에서도 쉽지 않은 캐릭터 연산군을 연기했다. 좋은 유망주인 것은 분명하지만 <야인시대>의 전반부 50회를 이끌 청년 김두한을 연기하기엔 아직 경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안재모를 캐스팅한 것은 <야인시대> 제작진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됐다.

드라마 만큼 흥미로웠던 <야인시대> 최강자 논쟁

 <야인시대>의 젊은 김두한 역으로 파격 캐스팅된 안재모는 2002년 S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야인시대>의 젊은 김두한 역으로 파격 캐스팅된 안재모는 2002년 S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SBS 화면캡처

<야인시대>는 KBS 대하 사극이 꽉 잡고 있는 주말 시간대를 피해 월화드라마로 편성됐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광복 직후까지 1부, 광복 이후부터 4.19혁명 및 5.16 군사정변 직후 제3공화국의 출범, 그리고 김두한의 사망까지 2부로 구성돼 있다. 당초 SBS는 1,2부 각 50회씩 총 100부작으로 기획했지만 <야인시대> 집필을 위해 수 년 전부터 준비해 온 이환경 작가의 요청으로 총 124회로 종영됐다.

<야인시대>는 김두한이 조선과 일본의 강자들과 싸우는 액션 활극으로 진행된 1부와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두한의 삶을 조명한 2부의 색깔이 크게 다르다. 젊은 시청자들은 안재모의 카리스마와 화려한 액션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1부에 더욱 열광했고 실제 시청률도 1부가 훨씬 높았다. 안재모는 <야인시대>를 통해 2002년 SBS 연기대상에서 10대 스타상과 대상을 휩쓸며 스타 배우로 급부상했다.

1부의 대미를 장식하는 50회 엔딩에서 주요 캐릭터들이 바뀌는 장면 전환은 '시청률 반토막 사건'으로 오래도록 회자됐다. 실제로 안재모 출연 당시 50% 넘었던 <야인시대>의 시청률은 김두한이 김영철로 바뀌면서 20%대 중반으로 뚝 떨어졌다. 하지만 본격적인 정치 드라마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장년층의 시청자들이 유입됐고 "사딸라","내가 xx라니~" 같은 '전설의 명장면'이 탄생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의 세계관 최강자 논쟁도 방영 기간엔 물론이고 드라마 종영 후까지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궜다. 특히 김두한의 액션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청년기에는 두 인물의 승부가 결정되는 장면이 많지만 2부에서는 액션이 많지 않아 시청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더욱 뜨거워졌다. 특히 분위기만 잡다가 실제로는 한 번도 싸우지 않았던 '김두한 vs. 시라소니'는 세계관 최강자의 단골 논쟁거리였다.

김두한조차 한 수 접었던 마지막 낭만파 주먹

 조상구가 연기한 시라소니는 2부에서 급격히 줄어든 액션을 책임지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조상구가 연기한 시라소니는 2부에서 급격히 줄어든 액션을 책임지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SBS 화면캡처

많은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트렸던 1부 엔딩에서 유일하게 시청자들의 기대를 키웠던 인물이 바로 조상구가 연기한 시라소니였다. 낭만파 주먹을 상징하는 마지막 인물이었던 시라소니는 야인시대 세계관에서 최강으로 꼽히는 인물로 김두한마저 시라소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형님으로 우대했다. 시라소니는 동대문 상인 연합회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한 것을 제외하면 작 중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2부에서 김두한과 함께 최강자로 불리는 싸움꾼이 시라소니였다면 1부에서 청년 김두한의 라이벌은 최재성이 연기했던 일본 유도대회 7년 연속 우승자 마루오까 경부였다. 마루오까는 김두한이 김무옥(이혁재 분)을 보내 약점(턱)을 미리 알아내 간신히 승리했을 정도로 상당히 버거운 상대였다. 이정재(김영호 분)가 해장국을 유난히 좋아했던 것처럼 마루오까는 설렁탕을 조선의 '최애음식'으로 꼽았다.

구마적(이원종 분)이나 마루오까 같은 전투력은 없지만 유년 시절부터 김두한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등 김두한과 악연이 깊은 미와 경부(이재용 분)는 1부의 최종 보스에 해당하는 악역이다. 일본 제국경찰 미와는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는 것을 '성전을 수행하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광복을 맞은 후 김두한과 고등계 형사들이 들이닥치자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 후 권총으로 자결해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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