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A <체크인 한양> 방송 화면 갈무리
채널A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강점할 즈음부터 이 땅의 관습과 문화를 샅샅이 조사했다. 한국인들의 심리와 의식을 연구할 목적에서였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조사 자료로 분류되는 <조선풍속집>이다.
이 자료의 연구 대상 중 하나는 숙박 문화다. 이 책은 주막이나 객주·여각 등으로 불리는 숙박 시설을 열거하면서, 상인들을 상대하는 업소에는 마굿간이나 창고 등이 갖춰진 경우도 있지만 이 업종 자체가 전반적으로 열악했다고 평한다. "왜소한 초가집과 불결한 음식물에는 조선의 풍토에 익숙한 모국인마저도 구토를 일으키게 만든다"고 혹평했다.
<조선풍속집>은 이 땅에서 숙박업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를 상류층과 고관대작 혹은 세도가들의 수요에서 찾았다. 이들이 민간 업소를 이용하지 않고 주로 관청 시설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책의 설명은 이렇다.
"고래로 조선에서 여관업이 발달하지 않은 원인은 대관세도(大官世道)의 여행에 대해서는 관청의 일부를 이들의 숙박에 할당하도록 준비된 방이 있고, 주군(州郡)의 관리가 대접을 담당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돈을 물 쓰듯 하는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로 했던 데 있다."
왕조는 공무상의 여행자에게 숙박 시설을 제공했다. 원(院)으로 불린 이런 시설의 흔적은 한양 사대문 주변의 지명에도 남아 있다. 홍제원·이태원·전관원(전곶원)·보제원·명일원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런 시설 외의 일반 관청도 관료나 고위층에게 숙박 서비스를 제공했다. 위 책에도 설명됐듯이, 지방 관원들은 손님에게 객사를 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저런 대접도 함께 제공했다.
관직과 관계 없는 재력가들도 그런 대우를 받는 게 가능했다. 광해군의 최측근인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전라도 남원의 부자 청년도 그런 대접을 받았다. 양씨 성을 가진 이 청년은 지방 수령의 친척이었다. 재력가라는 점과 더불어 혈연적 요인도 그런 서비스를 받은 배경이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양씨는 평안도 기생들을 동경했다. 그러던 차에 부모뻘 되는 친척이 평북과 평남의 경계인 정주목의 목사가 됐다. 양씨는 네 필의 말이 이끄는 호화로운 수레를 타고 정주목을 방문했다. 정주목사는 그에 대한 접대를 관기에게 맡겼다.
양씨는 그 상태로 무려 3년간이나 정주목에 체류했다. 갖고 간 금전 대부분이 관기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뒤에야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헤어진 옷에 나귀를 타고 처량하게 돌아가던 그는 기생과의 이별이 너무나 서러운 나머지 반나절쯤 가서 펑펑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옆에 상인 하나가 다가와 함께 울었다. 그도 정주목 기생과 사귀다가 돌아가는 중이었다. 서로의 사연을 듣고 동병상련을 느낀 두 남자는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잠시 뒤 양씨는 "그 기생 이름이 뭡니까?"라고 물었고, 같은 인물과 만난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곧장 옷을 툭툭 털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고위 관료들이 좋아했던 '템플 스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