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A 사극 <체크인 한양>에는 대궐 만한 호텔인 용천루가 등장한다. 고급 식당, 예식장, 연회장과 미용시설 등을 갖춘 이곳에는 세 등급의 고급 객실이 구비돼 있다.

드라마 제2회 초반에서 교관 방사선(김윤배 분)이 신입 교육생들에게 용천루 시설을 안내했다. 이때 그는 기본 객실인 홍의각과 한 등급 위인 청의각을 소개한 다음, 아래와 같은 설명을 했다. 손님이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아 있는 장면이 이 설명과 함께 화면에 나왔다.

"그리고 그 위 금의각(金擬閣)! 용천루의 가장 고급 객실이다. 비싼 만큼 아무나 묵을 수는 없다. 금의각 안에서는 손님이 원하시는 모든 접대에는 불가능은 없다. 손님이 원한다면 왕도 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숙박 문화는 실제로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여관업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

 채널A <체크인 한양> 방송 화면 갈무리
채널A <체크인 한양> 방송 화면 갈무리채널A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강점할 즈음부터 이 땅의 관습과 문화를 샅샅이 조사했다. 한국인들의 심리와 의식을 연구할 목적에서였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조사 자료로 분류되는 <조선풍속집>이다.

이 자료의 연구 대상 중 하나는 숙박 문화다. 이 책은 주막이나 객주·여각 등으로 불리는 숙박 시설을 열거하면서, 상인들을 상대하는 업소에는 마굿간이나 창고 등이 갖춰진 경우도 있지만 이 업종 자체가 전반적으로 열악했다고 평한다. "왜소한 초가집과 불결한 음식물에는 조선의 풍토에 익숙한 모국인마저도 구토를 일으키게 만든다"고 혹평했다.

<조선풍속집>은 이 땅에서 숙박업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를 상류층과 고관대작 혹은 세도가들의 수요에서 찾았다. 이들이 민간 업소를 이용하지 않고 주로 관청 시설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책의 설명은 이렇다.

"고래로 조선에서 여관업이 발달하지 않은 원인은 대관세도(大官世道)의 여행에 대해서는 관청의 일부를 이들의 숙박에 할당하도록 준비된 방이 있고, 주군(州郡)의 관리가 대접을 담당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돈을 물 쓰듯 하는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로 했던 데 있다."

왕조는 공무상의 여행자에게 숙박 시설을 제공했다. 원(院)으로 불린 이런 시설의 흔적은 한양 사대문 주변의 지명에도 남아 있다. 홍제원·이태원·전관원(전곶원)·보제원·명일원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런 시설 외의 일반 관청도 관료나 고위층에게 숙박 서비스를 제공했다. 위 책에도 설명됐듯이, 지방 관원들은 손님에게 객사를 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저런 대접도 함께 제공했다.

관직과 관계 없는 재력가들도 그런 대우를 받는 게 가능했다. 광해군의 최측근인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전라도 남원의 부자 청년도 그런 대접을 받았다. 양씨 성을 가진 이 청년은 지방 수령의 친척이었다. 재력가라는 점과 더불어 혈연적 요인도 그런 서비스를 받은 배경이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양씨는 평안도 기생들을 동경했다. 그러던 차에 부모뻘 되는 친척이 평북과 평남의 경계인 정주목의 목사가 됐다. 양씨는 네 필의 말이 이끄는 호화로운 수레를 타고 정주목을 방문했다. 정주목사는 그에 대한 접대를 관기에게 맡겼다.

양씨는 그 상태로 무려 3년간이나 정주목에 체류했다. 갖고 간 금전 대부분이 관기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뒤에야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헤어진 옷에 나귀를 타고 처량하게 돌아가던 그는 기생과의 이별이 너무나 서러운 나머지 반나절쯤 가서 펑펑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옆에 상인 하나가 다가와 함께 울었다. 그도 정주목 기생과 사귀다가 돌아가는 중이었다. 서로의 사연을 듣고 동병상련을 느낀 두 남자는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잠시 뒤 양씨는 "그 기생 이름이 뭡니까?"라고 물었고, 같은 인물과 만난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곧장 옷을 툭툭 털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고위 관료들이 좋아했던 '템플 스테이'

 채널A <체크인 한양> 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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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관료는 물론이고 양씨 같은 재력가들도 여행 중에 현지 관청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민간 업소를 가급적 찾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수치로 여겨졌다. <조선풍속집>은 "여관은 하등 사회가 숙박하는 장소로 돼 있었다"라고 말한다.

민간 업소에 묵는 것은 지위나 재력이 낮다는 인상을 주기 쉬웠다. 위신을 중시하는 여행자들은 용천루 금의각 같은 데가 설령 있을지라도 그런 곳에는 가급적 가지 않았다. 조선시대 여행자에게는 관청 객사가 최고의 호텔이었다.

관청을 이용하기가 여의치 않은 관료들은 사찰을 이용하기도 했다. '템플 스테이'는 고위층 여행자의 위신을 그렇게 많이 깎아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찰의 하룻밤을 시로 남기는 사대부도 있었다. 병자호란 척화파의 대명사인 김상헌을 증조부로 둔 김창협(1651~1708)이 그 주인공이다.

시인과 시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수촌 임방(1640~1724)의 <수촌만록>에 김창협이 쓴 '귀로'가 소개돼 있다. 청풍군수 시절에 산사에서 잠을 자고 하산하던 그는 고개를 돌려 사찰을 올려다보며 그 시를 썼다.

"고개 돌려 구름 가의 절을 보니/ 거기서 지난밤 잔 것이 믿어지지 않네
스님은 외로이 회나무 앞에 서 있네/ 푸르고 푸른 산에서 손을 한번 휘저으니/ 이미 인간계와 천상계가 나누어졌네"

템플 스테이가 천상의 하룻밤 같았던 것이다. 이처럼 관료들이 관청이 아니면 사찰을 이용한 것도 민간 숙박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였다.

전국적으로는 물론이고 한양에서도 민간 숙박업은 발달하지 못했다. 그 이유 역시 고위층이나 재력가들과 관련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한양에 집을 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풍속집>은 "옛날 대관부호는 대부분 경성에 본가를 갖고 있어 경성에서도 여관이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기술한다.

본가가 지방에 있는 이들도 한양에 자가주택이나 셋방을 둔 경우가 많았다. 과거시험에 급제하면 고향과 한양을 오고가야 했기 때문이다. 양반 사대부들은 일반인에 비해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 중에 관청이나 사찰은 물론이고 지인의 집도 이용하기가 수월했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대부나 관료들이 여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점은 조선시대 숙박업의 미발달 원인 중 하나를 설명한다. 그래서 <체크인 한양>에서처럼 민간의 고급 숙박시설을 동경하는 분위기는 조선시대 고위층이나 상류층에는 별로 없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아무리 고급일지라도 민간 여각에 투숙하는 것은 고위층이나 상류층이 아님을 스스로 표시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체크인한양 여각 조선시대숙박업 객주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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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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