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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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도망 노비들을 찾아낼 제도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의 인구 센서스는 대략 5년 간격으로 실시되지만, 조선왕조는 3년 간격의 '노비 센서스'를 계획했다. <경국대전> 형전은 "공노비의 경우에는 3년마다 한번씩 속안(續案)을 작성한다"고 규정했다. 20년마다 정안(定案)을 작성하고 3년마다 보충해 노비들의 실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또 도망 노비를 찾기 위한 노비추쇄도감 같은 기구도 운영했다. 각 지방에 추쇄어사를 파견하는 일도 있었다. <춘향전>의 변학도 같은 탐관오리뿐 아니라 도망 노비들을 찾을 목적으로도 어사제도가 활용됐다.
사노비의 추쇄는 노비 주인의 몫이었지만, 사실상 국가 권력이 동원되는 일도 있었다. 경상도 구미 출신의 정조시대 무관이 남긴 <노상추 일기>에 따르면, 일기의 주인공인 노상추(1746~1829)는 함경도 길주 남성과 함께 도망간 소애라는 노비를 찾기 위해 지방 군병을 길주로 파견했다. 사노비를 잡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히 범법이었다. 더군다나 행동을 조심해야 할 관료가 이를 일기에 남긴 것은 이런 일이 적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이처럼 국가 권력과 노비 주인들은 도망 노비들을 항상 신경 쓰고 이들을 잡고자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조명리의 발언에서 나타나듯이, 국가 권력은 말로는 추쇄하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럴 역량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사노비들을 잡아들이는 일도 마찬가지다. 교통·통신이 지금보다 열악한 시대에 노비가 먼 지방으로 도주하면, 비용 문제 때문에라도 무한정 추쇄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의 최대 공로자는 의병들이었다. 이순신이나 권율 같은 관군 장수들의 기여도도 높았지만, 거의 다 점령당할 뻔 했던 전쟁 초반의 불리한 상황을 극적으로 뒤집은 것은 의병들이었다. 이 의병부대의 주력이 노비들이었다. 양반 의병장과 함께 일본군과 싸운 것은 그 양반의 노비들이었다. 노비들이 나라를 살렸기 때문에, 임란 이후로는 이들의 위세가 당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노비 추쇄를 어렵게 만들었다.
도망 노비들로 인해 국가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는 영조시대에 나온 법전인 <속대전>에서도 느껴진다. 이 법전에는 "도루노비(逃漏奴婢)를 신고한 자는 6명당 1명을 상으로 준다"는 규정이 있다. 도망가거나 누락된 노비를 여섯 명 이상 찾아주면 노비 6명 당 1명을 포상금으로 주겠다는 규정이다. 국가 권력이 직접 체포할 여력이 별로 없었다는 점, 포상금을 현금이나 쌀로 지급할 만큼의 재정적 여력이 없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결국 돈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