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 자료사진
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 자료사진JTBC

사극 <옥씨부인전>의 옥태영(임지연 분)은 억울한 약자를 변호하는 외지부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속에 항상 불안을 품고 산다. 그는 주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한 노비다. 그런 노비가 양반 사대부가의 부인으로 살고 있으니, 신분이 발각될 가능성을 늘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공노비(관노비)든 사노비든, 조선시대에는 옥태영 같은 도망 노비들이 많았다. 이런 노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한성부의 4부 학당 중 하나인 서학(西學)에서 교수로 일하는 조명리(趙明履, 1697~1756)의 발언이다.

일종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업무일지인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음력으로 영조 15년 11월 11일(양력 1739년 12월 11일) 조명리는 군주의 세미나 자리인 경연(經筵)에서 강의를 했다. 시독관(侍讀官) 자격으로 영조 임금 앞에 나온 그는 4부 학당 노비가 감소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서학을 예로 들면서 "서학의 노비는 본래 천(千)을 헤아렸으나 임진년의 추쇄(도망한 노비나 부역 등을 기피한 사람을 붙잡아 본래의 주인이나 본래의 고장으로 돌려보내던 일-기자주) 이후로 지금껏 30년 동안 한번도 추쇄하지 않은 탓에 지금은 백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해는 기미년이었다. 그로부터 27년 전인 1712년에 도망 노비 추쇄가 있은 뒤로 지금껏 한번도 추세가 없었다고 그는 언급했다. 추노 작업이 오랫동안 없었던 탓에, 천 단위를 헤아리던 서학 노비가 지금은 백 명도 안 된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수많은 공노비들이 법적 주인인 국가 혹은 서학과 소식을 끊은 채로 살고 있던 셈이다.

조명리가 임금 앞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옥태영 같은 도망 노비들로 인해 학교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성부 4부 학당의 운영 경비는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호조에서 나왔다. 호조는 4부 학당 공노비가 납부하는 공물에서 그 경비를 충당했다. 그래서 이곳 노비들의 도망은 한양 유생들의 학업에 지장을 줬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조명리는 추쇄를 제안했다.

국영 농지를 경작하고 공물을 납부하는 공노비도 있었고, 관청에서 행정 실무나 육체노동을 무보수로 담당하는 공노비도 있었다. 이런 노비들이 국가의 연락에 응하지 않거나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면 국가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명리의 발언에서 나타나듯이 국가 권력 담당자들은 노비의 도망 문제에 항상 신경을 썼다.

조선에는 '노비 센서스'가 있었다

 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 자료사진
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 자료사진JTBC

조선왕조는 도망 노비들을 찾아낼 제도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의 인구 센서스는 대략 5년 간격으로 실시되지만, 조선왕조는 3년 간격의 '노비 센서스'를 계획했다. <경국대전> 형전은 "공노비의 경우에는 3년마다 한번씩 속안(續案)을 작성한다"고 규정했다. 20년마다 정안(定案)을 작성하고 3년마다 보충해 노비들의 실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또 도망 노비를 찾기 위한 노비추쇄도감 같은 기구도 운영했다. 각 지방에 추쇄어사를 파견하는 일도 있었다. <춘향전>의 변학도 같은 탐관오리뿐 아니라 도망 노비들을 찾을 목적으로도 어사제도가 활용됐다.

사노비의 추쇄는 노비 주인의 몫이었지만, 사실상 국가 권력이 동원되는 일도 있었다. 경상도 구미 출신의 정조시대 무관이 남긴 <노상추 일기>에 따르면, 일기의 주인공인 노상추(1746~1829)는 함경도 길주 남성과 함께 도망간 소애라는 노비를 찾기 위해 지방 군병을 길주로 파견했다. 사노비를 잡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히 범법이었다. 더군다나 행동을 조심해야 할 관료가 이를 일기에 남긴 것은 이런 일이 적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이처럼 국가 권력과 노비 주인들은 도망 노비들을 항상 신경 쓰고 이들을 잡고자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조명리의 발언에서 나타나듯이, 국가 권력은 말로는 추쇄하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럴 역량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사노비들을 잡아들이는 일도 마찬가지다. 교통·통신이 지금보다 열악한 시대에 노비가 먼 지방으로 도주하면, 비용 문제 때문에라도 무한정 추쇄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의 최대 공로자는 의병들이었다. 이순신이나 권율 같은 관군 장수들의 기여도도 높았지만, 거의 다 점령당할 뻔 했던 전쟁 초반의 불리한 상황을 극적으로 뒤집은 것은 의병들이었다. 이 의병부대의 주력이 노비들이었다. 양반 의병장과 함께 일본군과 싸운 것은 그 양반의 노비들이었다. 노비들이 나라를 살렸기 때문에, 임란 이후로는 이들의 위세가 당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노비 추쇄를 어렵게 만들었다.

도망 노비들로 인해 국가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는 영조시대에 나온 법전인 <속대전>에서도 느껴진다. 이 법전에는 "도루노비(逃漏奴婢)를 신고한 자는 6명당 1명을 상으로 준다"는 규정이 있다. 도망가거나 누락된 노비를 여섯 명 이상 찾아주면 노비 6명 당 1명을 포상금으로 주겠다는 규정이다. 국가 권력이 직접 체포할 여력이 별로 없었다는 점, 포상금을 현금이나 쌀로 지급할 만큼의 재정적 여력이 없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결국 돈 때문이었다?

 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 자료사진
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 자료사진JTBC

이런 내용이 법전에 수록됐을 정도로 노비 추쇄는 쉽지 않았다.

노비 추쇄가 쉽지 않았던 이유 중에는 경기 활성화 문제도 있었다. 나중에는 양인 신분인 머슴(법전 용어는 고공·雇工)이 농업생산의 중추세력이 되지만, 조선 후기의 상당 기간까지는 예속 신분인 노비가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 국가 권력이 동원돼 노비 추쇄가 시끌법적하게 진행되면, 이들의 마음이 뒤숭숭해져 농업 생산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추쇄꾼들이 돌아다니면 이들이 논밭에 나가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경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국가는 노비 추쇄를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비슷한 이유에서 국가는 사노비 추쇄에도 제약을 가했다. 도망간 지 60년이 넘은 노비는 더 이상 추쇄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도 있었다. 추노 작업으로 생기는 국가나 노비 주인의 이익과, 그로 인한 민심이반 및 경기불황 등의 손실을 계량한 결과였다.

노비들의 도망은 국가나 노비 주인 입장에서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종의 사회진보를 추동하는 에너지였다. 도망 노비들의 상당수는 도시로 숨어들었고 이는 조선 후기에 도시 상업을 발달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노비들의 도망이 조선 경제의 외연을 확대하는 배경으로도 기능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경우, 노비의 도망은 위와 같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활력을 억제할 힘이 국가 권력과 노비 주인들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옥태영들'이 발각될 확률이 그리 높지 않았다. 도망 노비 신분을 숨기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었던 것이다.
옥씨부인전 도망노비 추노 노비추쇄 노비제도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