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라는 장르는 흔히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치부되지만, 허무맹랑함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실제 세계에선 가능하지 않은 소재나 배경을 활용하면서도 작품 속 세계관이 일관되고 개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판타지 장르라면 논리나 상식을 벗어나도 되는 도깨비방망이를 연상하지만, 실제로 높은 평가를 얻는 판타지 명작은 현실의 정치/경제/사회적 맥락을 수준 높게 고증한 것을 금방 깨닫게 한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이 그 대표적 사례다.

현실 못지 않게 가상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이, 판타지 장르의 덕목이지만 이를 변주해 현실과 가상 세계를 연결하는 구성의 판타지도 종종 등장한다. 이를 가볍게 변형하면 흔한 '이세계' 물이 되지만, 수준 높은 장르 변주의 경우 양산형 이세계물과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를 요구한다. 현실의 난제는 가상 세계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지만, 그 돌파구는 막상 현실에선 온전히 해소될 수 없거나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양산형 판타지 장르물에선 전가의 보도처럼 남용되는 마법은 판타지 고전이라 인정받는 명작들에선 극도로 사용이 제한되거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제약이 걸리게 마련이다.

그런 난이도 탓에 현실과 가상 세계를 오가며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는 제대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참 어렵다. 성공 사례도 드물다.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판타지 영화가 무척 희귀하지만, 그 중에도 특히나 찾기 힘든 편이다. 길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정도가 드문 사례일 테다. 스페인 내전의 실제 역사와 켈트-이베리아 신화를 연결하는 환상 세계의 신비하고 잔인한 아름다움에 판타지는 그저 아이들 대상이란 편견을 바꾸게 하는 수작이다. 그리고 타셈 싱의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 그 반열에 들 만하다. 하지만 본작은 여러 곡절 탓에 온전히 소개되지 못한 구석이 많았다.

오디어스에 대한 복수를 위해 뭉친 전사들의 환상 모험

"더 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더 폴"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오드(AUD)

외떨어진 조그만 모래섬에 다섯 명의 남자가 고립된 채 갇혀 있다. 육지가 그리 멀지 않지만, 그들 대부분이 수영을 못하는 터라 이들이 섬을 탈출할 희망은 희박해 보인다. 이들을 섬에 가둔 이는 그들이 절망 끝에 서로 싸우다 자멸하기를 기대한 듯하다. 터번을 두른 과묵한 인도인, 폭발물 전문가 이탈리아인, 건장한 노예 출신 흑인, 저명한 생물학자 영국인, 유명한 도적이라는 가면 쓴 프랑스인은 각각의 사연을 품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 모두 강력한 권력자 '오디어스'에게 복수를 꿈꾼다는 점이다.

하지만 섬을 탈출할 뾰족한 수가 없으니 복수는커녕, 이대로 있다간 서로 잡아먹거나 굶어 죽을 판이다. 그런데 실은 생물학자에겐 강력한 우군이 있었다. 그의 반려 원숭이가 낸 아이디어 덕분에 인근 바다를 헤엄쳐 건너던 코끼리 등에 타고 일행은 마침내 해변에 상륙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도, 원수 오디어스를 찾을 방도도 없던 이들 앞에 돌연 불타는 나무가 등장하고, 그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마술사 또한 오디어스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술사는 자신을 따라오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전한다. 이제 6명으로 불어난 전사들은 복수의 일념으로 한데 뭉친다.

열대 우림과 깊은 계곡, 광활한 황무지와 인적 없는 사막을 차례로 거치며 일행은 원수의 행방을 쫓는다. 우연히 사막 한가운데에서 무수한 노예가 끄는 오디어스의 화려한 마차를 붙잡은 그들은 복수의 희열에 불타지만, 마차 안에서 나온 건 오디어스가 아니라 그의 약혼녀 공주였다. 원한을 갚기 위해 오디어스와 관련된 모든 것을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노라 다짐한 그들은 공주를 처형해야 할지, 여부를 놓고 고뇌에 빠진다.

호기심 소녀를 위해 지어낸 대하 서사시

"더 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더 폴"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오드(AUD)

그러나 이 장대한 모험담은 실은 병원에 입원한 어떤 환자가 친구가 된 어린 소녀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이제 막 할리우드가 '꿈의 공장'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기 시작하던 초창기 시절의 일이다. (할리우드가 자리한) L.A. 근교의 어느 병원에는 농장에서 오렌지를 수확하던 중 나무에서 떨어져 쇄골 부위를 크게 다친 어린 소녀 '알렉산드리아'가 장기 입원 중이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병원 생활에 장난기 많은 소녀는 장난도 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병원 식구들과 교분을 쌓아간다.

알렉산드리아는 친한 간호사 '에블린'에게 손편지를 써 창문으로 날리지만, 하필 편지는 에블린이 아니라 다른 병실에 입원한 '로이'의 손에 들어간다. 편지를 되찾기 위해 병실을 방문한 알렉산드리아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로이와 금방 친해지고, 로이는 소녀에게 모종의 부탁을 하는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보상을 약속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에 몰입할 때쯤 되면,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 속 세헤라자데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은 여기까지!' 신공을 구사한다. 감질난 소녀가 이야기 재개를 보채면, 교묘하게 자신이 원하는 부탁을 이행하길 권한다.

실은 복수자들의 모험은 전부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에게 들려주는 내용 속 이야기다. 로이는 어린 친구를 통해 자신이 비밀리에 준비하는 계획에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이야기는 로이가 지어낸 것이다. 딱히 원작이 있거나 사전에 구상된 내용이 아니다. 알렉산드리아가 워낙 나이가 어린 데다, 영어가 능통하지 않다 보니 초반엔 용케 술술 넘어갔지만, 조금씩 들통이 날 위기를 간신히 넘기는 나날이 계속된다. 급조된 설정이다 보니 화면에 펼쳐지는 모험담은 온전히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인물과 내용이 점점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실제 일상과 겹치거나 침범하기 시작한다.

어느 감독의 전무후무한 '라이프 워크' 일대기

"더 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더 폴"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오드(AUD)

'라이프 워크'란 표현이 있다. 그야말로 한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온전히 쏟아부은 업적 혹은 결과물이란 뜻이다.

영화는 2006년에 완성되었지만, 작품을 구상한 최초부터 28년 걸렸다. 원작 판권 구매하고 '알렉산드리아' 역할 맡을 배우를 찾아 세계를 누빈 게 9년, 작품 속 환상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장소 로케이션 19년, 촬영 기간 4년을 소요한 대작이다. 컴퓨터 그래픽을 배제하고 오직 세상에 실존하는 경이로움을 찾아 24개국의 비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상상할 수 없는 수고와 난관을 거친 결과다. 인도 출신으로 저명한 광고영상 감독이 된 타셈 싱은 본인이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고 영화의 꿈을 키우던 20대 초반에 우연히 본 동구권 저예산 판타지 영화에 매료되어 언젠가 리메이크하겠다고 다짐한다. CF로 명성을 쌓고 상업영화도 흥행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그 기회가 왔다.

그러나 감독은 쉽고 당연한 길을 마다하고, 자신이 꿈꾸던 비전을 구현하고자 영화 속 복수자들처럼 세계를 가로질러 모험을 떠난다. 초장기 프로젝트에 투자자들은 고개를 저으며 떠나고, 감독은 전 재산을 털어 제작을 이어갔다. 누구보다 특수효과 연출에 해박하면서도 굳이 CG 활용 마다하고 자신이 상상하던 꿈을 실현하려 했다. 궁극의 판타지는 현실의 경이로운 풍경으로 온전히 구현된다는 독한 소신이다.

선택은 옳았다. 화면에 펼쳐진 장관 앞에 입을 벌리고 말을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 만리장성에서 무굴 제국 영묘로, 동남아시아 산자락 계단식 논에서 유럽의 중세 성곽도시로, 히말라야의 이 세상 아닌 것 같은 고원에서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까지 온갖 비경이 초현실 판타지의 배경으로 압도적 황홀경을 선사한다. 이만한 시각적 경이를 체험하기란 거의 불가능할뿐더러, 본 작품을 극장 스크린으로 목격하지 않고는 제대로 보았다 할 수 없도록 만들고 만다.

과시적 판타지를 넘어, 영화예술의 역사에 바치는 헌사로서의 작업

"더 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더 폴"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오드(AUD)

복수자들의 환상적 모험담으로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현실과 가상의 이야기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줄거리는 실은 낙오한 이들의 심경과 열망을 상상에서 구현하기 위함에서 비롯된다. 가난과 상실을 공유하는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우정과 헌신이 그저 지어낸 판타지를 뛰어넘어 그들 각자의 고단한 삶을 헤쳐나간다.

로이는 가난한 스턴트 배우다. 이미 고도로 계층화된 할리우드 제작현장에서 무리한 촬영 탓에 불구가 될 위기에 빠진 그는 연인도 주연 배우에게 빼앗기고 좋아하던 스턴트도 더는 못할 지경이다. 알렉산드리아에게 원하는 비밀 부탁은 그런 자포자기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역시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어렵게 쌓았던 집과 재산을 '화가 난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사랑하는 아빠도 희생된 과거가 있다. 결핍된 이들은 서로 공감하지만, 그들이 겪는 상처는 회복이 요원한 채다.

처음엔 로이가 소녀를 이용하기 위해 배우답게 지어내는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줄거리는 점점 주먹구구에 그칠 뿐만 아니라 로이의 상태가 악화하면서 어둡고 파괴적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이에 수긍할 수 없다. 소녀는 점점 이야기에 개입한다. 충돌을 거치며 두 사람이 극복해야 하는 시련이 이야기에 반영되기 시작한다. 주변 인물들이 이야기 속 캐릭터로 시각화되고, 모든 게 완결된 후에는 실제 인물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존재함을 관객은 확인하게 된다.

시대 배경을 굳이 1920년대, 영화예술이 세계적으로 전파되던 때로 잡은 건 작품의 대미를 확인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테다. 영화의 태동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꿈을 걸고 인생을 바쳤던 결단에 대한 헌사로서 장대한 판타지 걸작은 오롯이 봉헌된다. 그렇게 과시가 아닌 영화사랑이 충만한 작업이다.

감독은 이 영화에 창의와 열정을 쏟아낸 탓인지, 이후로 정체기를 걷는 중이다. 하지만 본 작품만으로도 후회가 없지 않을까? 그 실체는 좀 더 온전하게 감독의 비전에 근접한 4K 버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품정보>

더 폴; 디렉티스 컷
The Fall 4K re-mastered version
2006|인도/미국|모험/판타지/드라마
2024.12.25. (재)개봉|119분|12세 관람가
감독/각본 타셈 싱
출연 리 페이스, 카틴카 언타루
수입/배급 오드(AUD)
더폴오디어스와환상의문 4K리마스터링버전재개봉 타셈싱감독 리페이스 카틴카언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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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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