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감상에 가장 큰 장벽인 ‘언어의 전달’에 혁신적인 방법을 제공했다. 정씨는 고전 서양음악의 원어 자막을 무대장치의 일환으로 배치하는 기법을 시도했다.
필립리
첫째, 한국적 색깔로 관객의 공감대를 이끈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공간의 재해석이다. 우리는 티켓을 사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을 감상하러 왔지만, 막상 무대 위에 차려진 밥상은 과거 우리의 농촌마을이었다.
이렇듯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19세기 초 이탈리아 시골 마을에서 전개되는 러브스토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공간적 배경을 한국으로 옮겨온 정씨의 시도에 주목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양촌리 러브 스캔들>을 보러 왔다면, 낯선 서양문물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서 별도의 예열장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의 정서에 최적화됨은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여기에 원작 '사랑의 묘약'에서 전개되는 주인공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운 점을 충분히 배려했다. 가령, '네모리노(Nemorino)', '아디나(Adina)', '둘까마라(Dulcamara)', '벨코레(Belcore)' 등이 그런데, 정씨는 한국 관객들을 배려하여 주인공의 이름을 N군, A양, D씨, B중사 등 알파벳의 첫 자를 따서 번안해 부르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둘째, 개성 있는 캐릭터가 펼치는 앙상블의 열연이 눈에 띈다. 동네사람들로 참여한 16명의 앙상블 단원들은 전원일기에서 봤던 추억의 배역들이 연상된다. 특히 당시에 독보적인 캐릭터로 이름이 날렸던 일용엄니를 떠올리는 할머니에는 '일녀'가 감초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방실, 영미이모 등 다양한 배역들이 대극장을 채워 보는 이들의 혼을 빼놓았다.
물론 극의 흐름에서 중심을 잡은 4명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동안 간과돼 왔던 조연들에 대한 극중 배려가 돋보였다. 동네사람들로 모인 16명은 모두가 캐릭터성이 차고 넘치는 등장 인물들로 세세하게 구성해 관객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웃음포인트를 전달할 수 있었었다.
실제로 첫날 공연을 마치고 마련된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 어느 초등학생은 "(앙상블로 나온) 동네사람들은 코믹스러운 춤을 어떻게 연습했나요?"라고 물을 정도로 조연의 동작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렇듯 정 연출가는 각기 다른 관객층의 관람 취향을 놓치지 않고 모두를 저격하는 세심한 연출이 눈에 띄었다.
셋째, 이태리 원어가 한국어로 들리는 놀라운 마법이 펼쳐진다. 오페라 감상에 가장 큰 장벽인 '언어의 전달'에 혁신적인 방법을 제공했다. 정씨는 고전 서양음악의 원어 자막을 무대장치의 일환으로 배치하는 기법을 시도했다.
과감한 도전은 이미 전작부터 꾸준히 시도해 왔는데, 그것은 평소에도 어려운 오페라를 관객에게 친숙하게 접근시키려는 여러 방법들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라 고백했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도 무대 중앙의 뭉게구름 백판을 활용해 우리 입말에 맞게 이태리어를 번안한 자막을 띄웠다. 객석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자막이 씐 뭉게구름이 마치 배우들의 말풍선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이것은 무대장치와 자막을 혼연일체시켜 스크린에 대한 괴리감을 자연스럽게 소멸시켰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오페라를 감상할 때 무대 구석에 설치된 검은 스크린을 통해 보기 마련인데, 때로는 이것이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는데 방해된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장면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단점을 자연스럽게 해소할 수 있는 파격적인 묘책으로 보인다. 이런 연출 기법을 통해 관객은 음악과 극의 내용을 뮤지컬처럼 이해할 수 있으며, 빠른 대사 전달이 배우들의 감정처리를 즉각적으로 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오페라의 수용성을 높이는 셈이다.
마지막 퍼즐을 채우기 위한 바람들
▲오페라 <양촌리 러브 스캔들> 포스터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의감자다
2024년 들어서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몇 달 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일어났던 해외 유명 오페라 가수의 이슈를 통해서 오페라가 부각된 점도 있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오페라가 관심이 있었던 적이 있었나 되묻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려운 장르에 속하는 오페라를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씨의 노력이 서서히 빛을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을 마치고 그는 오페라의 핵심이 "단순히 가사의 의미를 아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음악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강조했다. 이것은 인간의 감정을 음악으로 듣는 과정이라는 소리라며 "기악 등이 인간 감정을 추상적으로 담았다면, 오페라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라고 설명을 더했다.
정씨는 공연을 연습하면서 배우들의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그간에 번안했던 자막들을 출연진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원어의 해석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쩌면 배우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연출자의 세심한 배려로 보인다. 그런데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출연진의 이태리와 한국 이름이 혼용되는 모습을 몇 차례 보였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초연 이후 공연의 대부분을 소극장에서 진행해왔는데, 이번에는 공연된 극장의 규모와 맞지 않는 소규모 편성(피아노, 현악 4중주, 관악기, 타악기)에 아쉬움을 남겼다. 실제로 필자가 앉은 1층 객석의 뒷자리에서는 배경음악의 일부 소리가 비어 들린다는 평이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정현 지휘자가 객석과의 대화에서 밝혔던 것처럼 "피아노가 음악의 방향성을 지시하기 때문에 일부 악기가 부족한 아쉬움은 다른 연주자들과 음악적인 조율로 메꾸어 나갔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음악에 대한 아쉬움의 원인을 오케스트라의 소규모 편성에 찾기보다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이 퍼포먼스극 중심에 최적화된 곳으로, 정통 클래식에 맞는 잔향시간을 확보하는 여부와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을까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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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다. 그동안 문화예술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2016~2023)에서 객원필진으로 글을 썼다. 현재는 대학로에서 공연과 전시를 보며 현장을 담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를 만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