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2024년 읽은 책 가운데 최고를 꼽으라 하면, 나는 이 책을 두고 제법 오래 고민할 밖에 없을 것이다. 킬리언 키건의 짤막한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야기다. 올해 읽은 훌륭한 책들, 이를테면 <사피엔스>나 <바베트의 만찬>처럼 걸작이라 해도 좋을 책들이 있었음에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최고를 고민할 수는 없다. 그만큼 이 소설엔 훌륭함이, 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소설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가 제작된단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영화가 마침내 이 겨울 한국에 상륙하여 선을 보였으니, 나는 굳이 영화평론을 업으로 삼고 있지 않았대도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보았을 터였다. 세상에 빠뜨릴 수 없는 영화가 있다면, 걸작이다 감탄하며 읽은 소설을 원작으로 그를 재구성한 작품이 아닐는지.

물론 훌륭한 원작이 그만한 작품을 낳는 건 아니다. 소설과 영화는 그 형식과 특징을 달리하는 탓으로, 소설에서 좋은 것이 영화에선 살지 않고 그 반대도 흔히 이루어지는 탓이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벌>이나 < 1984 >, <삼국지> 같은 걸작들이 형편없는 영화로 빚어지는 광경을 때때로 마주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포스터
이처럼 사소한 것들포스터그린나래미디어

훌륭한 소설, 그만큼 좋은 영화일까?

그럼에도 이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기다렸던 건 소설에서 느낀 감흥을 영상, 보다 입체적이며 직접적으로 재차 체험하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겠다. 경력이 일천한 팀 밀란츠가 연출을 맡았단 사실이 다소 아쉽긴 하였으나 킬리언 머피의 캐스팅부터 영화의 배경이 된 아일랜드 소도시의 공간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단 사실까지가 기대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영화로 다시 만나고픈 소설은 오랜만이기도 하였다.

영화는 1985년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지역 수녀원이 마을의 모든 문제에 개입해 입김을 행사하는 동네로,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빌 펄롱(킬리언 머피 분)이란 사내가 주인공이 되겠다. 빌은 석탄을 배송하는 작은 사업체의 사장이다. 사장이라곤 하지만 직원 몇 명을 두고 항만에 들어온 석탄을 실어 그를 필요로 하는 마을 곳곳에 퍼나르는 일꾼의 우두머리 정도라 보아야 옳겠다.

보아하니 지난 세월이 꽤나 고되었던 듯 그의 표정이며 행색, 태도와 분위기에 지나온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다. 여전히 사업이 번창했다거나 대단한 여유가 있는 건 아니라지만 그를 믿고 성실히 일하는 직원이 벌써 여럿이고, 지역 내 꾸준히 거래처를 늘려가며 신용을 쌓고 있으니 성장가도에 있다 해도 좋겠다. 일은 험하고 주머니엔 동전 몇 개 굴러다니는 게 고작이지만 빌에겐 나름대로 지킬 것이 있다. 아내와 무려 딸이 다섯이나 있는 집에는 바깥에선 찾아볼 수 없는 온기가, 행복이 있는 것도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이처럼 사소한 것들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

부모 없이 자란 아이, 다섯 딸의 아버지

사실 빌은 고아다. 아버지 없이 태어나 어머니마저 어릴 적 잃어버린 그를 어머니가 일하던 대저택의 주인 윌슨 부인이 거두어 데리고 살았던 것이다. 부모가 없었으나 어른이 될 때까지 부족함 모르고 자란 그가 성인이 되어 지역에서 제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게 된 데는 윌슨 부인이란 어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보아도 좋을 테다.

그리하여 빌은 팍팍한 일상에도 온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됐다. 길을 가다 어려워 보이는 이를 만나면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 가진 동전을 반쯤 집어주는 어른 말이다. 가난이 공기처럼 떠도는 이 궁핍한 마을에는 캣맘들이 내어놓은 우유를 몰래 집어 마시는 불운한 아이 또한 있는 것이지만, 다른 이들이 외면하는 그 같은 현실을 빌은 좀처럼 지나치지 못한다. 그런 이가 경영하는 사업체니 조금씩 평판이 좋아지는 것도 자연지사, 그를 오래 보아온 이들은 말 없고 재미없는 이 사내에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발견하게도 된다.

검댕 묻혀가며 석탄을 퍼나르는 일이 무어가 좋을까. 대단한 돈을 만지는 것도 아니고 남들에게 행세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빌에겐 지키고픈 가정이 있어 제 둥지 안에 검댕 하나 허락하지 않는다. 그를 마치 사명처럼 여기며 일상을 지탱하고 산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이처럼 사소한 것들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

석탄 검댕 묻은 손으로 의로움을 잡기까지

영화는 빌이 퇴근한 뒤 검게 물든 손과 얼굴을 세심하게 씻고 나서야 가족들이 있는 거실로 들어서는 광경을 수차례에 걸쳐 보여준다. 바깥의 때가 묻지 않은 순박한 아이들이 마치 긁어내듯 때를 벗긴 아버지와 마주하여 그가 바깥에서 겪었을 무엇도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건 그대로 가장이 어떤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지. 오로지 가정의 행복, 저의 무엇도 챙기지 않으며 가족을 위한 삶이 곧 저를 위한 것이라 믿는 빌의 삶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이름 모를 작은 도시까지를 신은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토록 작은 위안마저 가져가버리니 말이다. 여느 때처럼 석탄을 배달 간 그가 수녀원 광을 열고 석탄 몇 무더기를 넣어두려 했던 날이다. 절로 몸을 움츠리게 되는 추운 날씨, 깊은 새벽, 아무도 없어야 정상인 그 광 안에 사람이 있다. 빌의 작은 위안을 산산이 깨어버릴 작고 가여운 사람이.

영화는 빌과 같은 평범하고 성실한 이가 수녀원에서 학대당하는 아이를 두고 볼 수 없게 되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그저 제 집 말고는 무엇에도 관심두지 않는 듯 보였던 재미없는 인간이 제 온 삶을 뒤흔들 수 있는 일에 끼어들기까지, 그 앞에 일어난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사건들을 비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이처럼 사소한 것들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

왜 이 영화를 보아야 하느냐 묻는다면

영화는 아일랜드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22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75년 동안 이어진 막달레나 수녀원의 여성학대 사건. 타락하고 방탕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을 학대하고 강제노동에 투입한 이 수녀원은 최소한의 노동조건조차 지키지 않은 채 직업여성이나 미혼모, 또 고아거나 부모가 보호하려 들지 않는 이들까지 무작정 잡아들여 노동으로 참회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집단생활을 시켰다. 빌이 석탄광에서 마주한 건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소녀로, 탈출하고 싶다는 욕구 아래 무작정 밤 깊을 때까지 석탄광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수녀원이 지역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폐쇄적 사회에서 그를 파헤쳐 고발하는 일이 쉬울 수는 없다. 수녀원에서 석연치 않은 일을 마주하고 빌이 겪게 되는 일은 비단 막달레나 수녀원, 또 아일랜드 사회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제 모든 것이라 해도 좋을 일과 가정의 평안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 또 모두가 외면하는 불의를 저 홀로 맞서야 한다는 막막함, 그 모든 감정들을 뚫고 평범한 이 남자가 일어서기까지의 이야기는 수많은 부조리에 눈감고 귀 막은 채 오늘의 안락을 구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오늘 한국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지는 않은지.

소설에서 그려지지 않은 단 한 장면을 영화는 또한 그 끄트머리에 덧붙이는데, 바로 이 장면만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새삼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진실은 좀처럼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수면 위에 드러난 뒤에도 모두가 그를 아무렇지 않게 외면한다. 빌이 어느 순간 저만 빼고 모두가 수녀원의 불의를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처럼, 또 우리 사회의 진실들이 저기 거리의 1인시위자가 든 피켓처럼 모두가 마주할 수 있는 곳에서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로 투명해져갈 때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2024년 한국사회에 유효한 작품이라 여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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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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