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주인공은 금슬 좋은 부부 현수(이선균 분)와 수진(정유미 분)이다. 임신한 아내는 곧 출산을 앞두고 있고, 아직은 무명 배우인 현수는 작품활동에 매진하는 한편으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부쩍 느끼는 중이다. 아직은 불안할 법도 한 나날이지만, 아내의 격려 덕분인지 부부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믿음이 자리한다.
그러던 어느날부터인가. 현수가 수면 중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잠에서 잘 깨지 못하는 건 물론, 잠든 사이 집 안을 걸어 다니고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까지 하는 것이다. 현수가 냉장고를 뒤져 날고기며 날생선을 먹는 모습까지 보고 나니 수진이 불안해지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심지어는 맨 정신일 땐 한 번도 본 적 없는 폭력적인 태도까지 보여 수진은 당혹하게 된다. 병원에 가 봐도 명확한 진단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 출산일이 가까워지며 불안은 갈수록 깊어만 진다.
아이가 태어난 뒤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언제 침실 밖으로 나올지 모를 현수가 아이에게 해를 입힐 수 있으리란 불안이 커져만 간다. 특히 키우던 개가 끔찍하게 죽은 뒤 수진은 현수로부터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불안에 휩싸여 간다.
병은 호전될 줄 모르고 상황만 심각해지는 가운데 영화는 수진의 변화를 공포물의 양식으로 포착해낸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차츰 변해가는 수진의 모습은 모성애의 일면에서 캐릭터적으로 설득력을 얻지만, 동시에 그 변화의 수위가 현수는 물론 관객 일반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영화는 수진을 선으로, 현수를 그를 위협하는 악으로 포착해내는 단순한 설정을 거부한다. 잠든 현수는 관객이 쉬이 예상할 수 있는 위협이지만, 그로 인해 변해가는 수진의 모습은 예상할 수 없는 위험으로 그려진다. 마침내 영화는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미신을 빌려와서는 수진이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제 남편을 억제하려 하는 모습으로 나아간다.
몽유병 증상이 돈 이후 현수가 믿을 수 없는 남편이 되고, 또 그로부터 수진 또한 믿을 수 없는 아내가 되는 과정이 이색적이다. 얼핏 공고한 듯했던 부부의 모습이 몽유병이란 질환 하나만으로 어디까지 깨져나갈 수 있는지를 영화가 살핀다. 확고했던 신뢰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몽유병 증상 발병 이후 산산이 부서진다.
수진은 아내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다하려 애쓰지만 어디까지나 사명감일 뿐 불안을 잠재울 만큼의 믿음은 없는 것이다. 영화는 타인 간의 결합인 부부관계의 허점을 끈질기게 파고들어 균열을 내고, 그로부터 무엇도 믿을 수 없다는 불안을 증폭시킨다. 외부의 공격에 치명적인 아이의 존재는 그 불안을 공포로 변환시키는 최적의 소재다.
몽유병과 공포의 절묘한 만남
▲잠포스터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두 축 모두가 불안정한 캐릭터가 돼 관객의 마음을 뒤흔드는 과정은 <잠>의 백미다. 현수가 아이를 안고서 베란다 난간에 서기만 해도 관객은 마음이 땅에 떨어지는 듯한 불안을 맛본다. 수진이 잠에서 깨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또 아이의 요람에 아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의 상황은 그대로 공포가 된다.
유재선 감독은 꿈과 현실을 능란하게 오가며 관객에게 수진, 또 현수가 느낄 법한 공포를 맛보도록 한다. 롱테이크와 클로즈업의 적절한 활용, 불안을 증폭시키는 음향효과, 고정되지 않은 캐릭터, 다른 무엇보다 이선균과 정유미의 섬세한 연기는 영화가 필요로 하는 감상을 적절하게 일으키는 결정적 요소로 활용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공간의 대부분을 아파트 내부로 한정짓고, 등장하는 인물도 주인공 부부를 중심으로 풀어감에도 극적 재미가 떨어지지 않는단 점이 아이디어와 디테일의 힘을 알도록 한다.
여러모로 <잠>은 한국영화가 가진 자산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몽유병이란 흔한 소재와 평범한 가정의 모습으로도 세계에 통하는 긴장과 불안, 공포를 얼마든지 자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봉준호 감독이 주장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말이 어떠한 뜻인지를 내보인다. 바로 여기에 중차대한 역할을 해낸 것이 이선균이란 더없이 선하면서도 억울하고 동시에 투명하면서 인간적인 모습을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의 존재였다.
한국영화가 영영 그를 잃고 말았단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오늘이다. 그가 어떤 배우였는가를 이 영화 <잠>이 내보인다. 많은 이들의 시작점이기도 한 이 영화 가운데서 중추적 역할을 맡은 그의 마지막을 보게 된다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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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