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 스틸컷
CJ ENM
03.
"얼마나 더 죽어야 독립이 되겠는가?"
영화 전체를 돌이켜보면, 이 작품은 안중근 한 사람의 일기를 따르고 있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는다. 해당 인물을 축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의 이야기에만 몰두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영화 <하얼빈>은 대한의군이자 동료인 인물은 물론, 반대쪽에 놓인 이토 히로부미 등의 서사를 모두 포용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는 실제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까지 여럿 만들어내 그 이야기를 펼쳐낸다. 타이틀이 '안중근'이나 '영웅', '도마'가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극 중 모든 인물은 1909년 10월 26일의 하얼빈역에서 일어날 거사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는 하나의 근거가 더 있다. 거사 5일 전, 전후에 놓인 두 개의 장면이다. 이전의 장면에서는 김상현(조우진 분)과 우덕순(박정민 분)이 내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누구인지 확정하지는 않지만, 둘 중 하나가 밀정임을 암시하는 듯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또 하나, 이후의 장면에서는 중근이 공 부인(전여빈 분)과 함께 청나라 마적 떼의 두목이 된 박점출(정우성 분)을 찾아간다. 이 장면들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각각 나라와 동료를 배신한 간자(間者)와 독립운동의 후유증으로 망가진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 해당한다. 이 영화는 분명히 한 인물에 대한 서사가 아니다.
문제는 영화가 담아내고자 하는 여러 인물의 서사 모두가 개개인의 오롯한 서사로 연결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앞선 두 서사만 보더라도 개인의 서사라기보단 집단 혹은 단체(간자 전체, 독립운동으로부터 이탈한 이들 모두)의 서사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누구도 극 중 인물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인물 각자가 갖는 설득력과 힘 자체는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영화 <하얼빈>이 인물을 그려내는 일에, 또 그 인물이 극을 추동시킬 에너지를 완성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다.
04.
"너무나 많은 동지들을 잃었습니다. 더 많은 동지를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민호 감독은 안중근 의사를 한 인간으로 그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동지를 잃는 것, 기억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슬픔과 절망의 감정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경험하는 인물로서 말이다. 그동안의 작품이나 다른 이야기에서는 분명히 감춰져 왔던 면모다.
그의 의지는 중근의 첫 번째, 두 번째 대사로부터 알 수 있다. 그는 첫 대사를 통해 '동료들이 잘 도착했냐'고 묻고, 두 번째 대사로는 '살아서 만나 좋다'는 말을 한다. 누군가를 잃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달리 표현된 말이다.
하나가 더 있다. 영화 속 간자를 그려낸 이유 역시 인간적인 면모, 어떤 나약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견딜 수 없는 잔혹한 폭력 앞에서 생존에 대한 욕망을 뿌리치지 못한 인물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 실제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인물을 창조해 냈고, 여기에 픽션을 덧씌웠다. 실제 역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 과정에 밀정이 개입된 사실은 없다. 극 중 채가구역 신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두 가지 시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영화의 톤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한 용도와 갈등의 서사를 비롯한 스파이 장르의 형식적 태를 완성하는 일 외에는 다른 의미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안중근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역사적 사실을 바꾸면서까지 이야기를 각색하는 두 시도는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장면에서 인물이 보여줘야 할 담대하고 뜨거운 마음은 관객의 일반적인 상식과 이해에 기대고 있으면서, 사건에 대한 사실 자체는 수정해 버렸으니 말이다.
역사적 사실에 각색과 창작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보완을 위한 방안이 필요했다. 이 사이의 간극은 오해와 왜곡을 일으킬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