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A <체크인 한양> 방송화면 캡처
채널A <체크인 한양> 방송화면 캡처채널A

지난 21일부터 방영된 채널A 사극 <체크인 한양>에는 대궐 맞은편에 세워진, 대궐과 맞먹는 규모의 대형 여각이 등장한다. 이 여관의 화려함은 궁궐과 다를 바 없다. 직원 숫자도 마찬가지다. 숙박시설뿐 아니라 뷔페식 식당, 연회장, 예식장, 마사지 시설도 갖추고 있다. 상호마저 용천루다. 군주가 독점하는 '용'의 이미지를 쓰고 있다.

용천루 주인 천막동(김의성 분)이 주상 이현위(한재석 분)와 독대하는 장면은 시청자들을 순간적으로 헷갈리게 할 수 있다. 곤룡포를 입고 있는 임금 이현위를 알현하는 장면에서, 천막동은 곤룡포 비슷한 옷을 입고 등장한다. 용 무늬가 새겨진 의복을 착용한 그의 모습은 기존 사극에 나오는 상인 혹은 기업인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난다.

용천루는 세금도 많이 내고 정치헌금도 많이 낸다. 외형상으로는 국가질서에 승복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국가질서와 다른 원리가 작동한다. 이곳에서는 철저히 능력제가 우선시된다. 왕조국가의 신분제 질서가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왕실과 용천루의 상호 양해하에 용천루 교육생으로 입사한 왕자 이은(배인혁 분) 역시 일반 교육생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용천루 내부의 능력제는 실은 여각 주인의 가치관을 반영하다. 군주가 운영하는 신분제 질서를 무시하는 논리라고도 할 수 있다. 용천루는 독립왕국을 연상케 하는 또 하나의 세계다.

왕실이 민간 사치 억제한 정치적 이유

어느 시대건, 용천루 주인처럼 재력을 과시하며 왕처럼 살아보고자 했던 세력가들이 있었다. 용천루 주인의 위세는 실제 역사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옛날 세력가들이 마음 속으로 갈망했던 이상이다. 실제 역사와는 무관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재력 과시 및 사치 풍조와 관련된 왕조시대의 정치 메커니즘을 반영한다.

왕실이 민간의 사치를 억제한 것은 자원을 절약하고 미풍양속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재력을 과시하는 야심가들로부터 왕실의 위상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부유한 평민이나 귀족이 왕실을 능가하는 재력을 뽐내게 되면 세상의 발걸음은 그쪽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관중이 썼다고 알려졌지만 저자가 확실치 않은 <관자>는 사치 규제가 신분제 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책 입정(立政) 편은 "작위의 높낮이를 헤아려 의복을 다르게 규정하고 녹봉의 많고 적음을 따져 필요한 재물을 규정한다"라면서 "(지위에 따라) 음식에 정량이 있고 의복에 규정이 있으며 가옥에 법도가 있다"고 했다. 과도한 재력 과시 혹은 사치는 서열 질서를 훼손하는 위험 요인이라는 관념을 저변에 깔고 있다.

골품제를 운용한 신라의 사치 규제 법령은 <삼국사기> 잡지(雜志) 편에 상세히 규정돼 있다. 이에 따르면, 5두품의 방은 길이와 너비가 18자를 넘을 수 없고, 4두품 이하 일반 백성의 방은 15자를 초과할 수 없었다. 또 6두품과 5두품은 호피를 사용할 수 없었다. 4두품 이하는 담요에 털을 댈 수 없었다. 모포나 중국제 담요도 금지됐다. 이 같은 사치 규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시대들에도 있었다.

상인 계층에 대한 규제는 한층 엄했다. 수입이 뻔한 농민층과 달리 언제 어떻게 대박이 날지 알 수 없는 상인들은 왕실과 조정의 경계 대상이었다. 한 곳에 정주하는 농민들과 달리 이들은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정보를 전달하고 민심에 영향을 줬다. 그런 이유 때문에도 경계를 많이 받았다.

귀족과 관료층의 사치는 주로 왕실의 경계 대상이었지만, 상인들의 사치는 왕실은 물론이고 귀족과 관료층 전체의 경계 대상이었다. 상인들의 경제력 상승은 이들 모두의 지위를 떨어트릴 수 있었다.

그 점을 특히 우려한 군주가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이다. 그는 고인(賈人)으로 불린 상인 계층에 대해 고도의 규제정책을 펼쳤다. 한나라의 경제 및 재정 문제를 다룬 <한서> 식화지는 "천하가 평정된 후 고조는 고인들이 비단옷을 입거나 수레를 타지 못하게 했으며, 조세를 무겁게 해 그들을 곤욕스럽게 했다"고 알려준다.

'규제'는 동서고금 막론한 단골 이슈

 채널A <체크인 한양> 방송화면 캡처
채널A <체크인 한양> 방송화면 캡처채널A

오늘날의 신문 사설에 숱하게 나오는 단골 주제 중 하나는 '기업에 대한 규제를 풀라'는 요구다. 상인이나 기업에 대한 규제는 기원전 202년에 세워진 한나라에서도 주요 이슈였다. 그래서 그 시절 상인들 역시 '규제 완화'를 항상 희망했다. 그들은 언제나 경제력의 팽창을 갈망했다. 그런 그들의 영업행위는 물론이고 재력 과시 역시 옛날 왕조들의 관찰 대상이었다.

민간 세력가들의 위상을 억제하기 위한 사치 규제는 조선시대에도 당연히 이어졌다. 이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귀가 따갑도록 사치 규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사도세자의 세 살 때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궁중에서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자문을 배우시다가 사치 치(侈)와 넉넉할 부(富)자가 나오자, '치'자를 손으로 짚고 당신이 입으신 옷을 가리키시며 '이것이 사치다'라고 하셨다."

이 책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명주는 사치고 무명은 사치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 사치에 관한 이 같은 교육은 세자의 검약을 유도하는 측면도 있지만, 세자가 훗날 왕이 돼 사치 풍조를 규제하도록 유도하는 측면도 있었다. 세 살짜리 세자의 머릿속에도 각인됐을 정도로 왕조시대에는 사치 규제가 중요한 문제였다. 이는 왕실의 권력 유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고대의 제정일치시대에는 제사장 겸 군주가 스스로를 태양의 후예로 자처하는 일이 많았다. 그들이 착용한 빛나는 장신구나 햇빛을 반사하는 청동 거울 등은 그런 이미지 조작에 유용했다.

KBS <역사 스페셜>의 방송 내용을 정리한 <역사 스페셜> 제1권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경(청동거울)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경은 대개 가슴에 차고 다닌 것으로 추정한다"라며 "고대 사회에서 왕은 태양 같은 존재, 그리고 태양은 생명의 빛, 그 빛이 동경을 통해 땅으로 내려오고 그때부터 동경은 왕의 상징물이 된다"고 했다.

이어 "이 동경을 가슴에 차고 행차하면 햇빛을 받아 더욱 번쩍거렸을 것이고, 그것 자체로도 상당한 권위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시절에 민간 재력가가 금은 장식물을 몸에 걸치고 청동 거울로 스스로를 빛낸다면, 이는 제정일치 군주에 대한 도전 행위로 비쳐질 소지가 있었다. 이처럼, 사치 규제의 역사는 정치권력의 초기 형성 과정에서도 접할 수 있다.

사치 규제가 지속적으로 시행된 것은 국가권력의 억제 정책에도 아랑곳없이 민간 부유층들이 끊임없이 재력과 위세를 과시했기 때문이다. <체크인 한양>은 왕처럼 살아보고자 했던 그들의 욕망과 그것을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됐던 왕실 간의 갈등과 알력을 떠올리게 하는 사극이다.
체크인한양 여각 사치 왕권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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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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