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옥씨부인전>은 지방 수령과 유향소의 관계를 비중 있게 묘사한다. 청수현 양반들을 대표하는 드라마 속의 유향소는 현감과 협력을 모색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현감 성규진(성동일 분)의 집안을 몰락시키기도 했다.
유향소의 위세를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드라마 속의 자모회다. 유향소 간부의 부인들이 주축이 된 이 모임은 지역 현안과 인사문제 등에도 개입한다. 드라마 주인공인 옥태영(임지연 분)은 시아버지 성규진의 입장을 대변하며 이 모임과 대립했다.
드라마 속의 유향소는 군주의 대리인인 현감에 대해서는 주로 라이벌의 이미지를, 일반 백성에 대해서는 주로 억압자의 이미지를 띤다. 유향소 양반들은 아동들을 몰래 납치해 불법 광산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이를 감추기 위해 성소수자 단체인 애심단을 역모단체로 몰아 관아의 눈귀를 그쪽으로 돌렸다.
자치단체장 자문기구와 유사했던 유향소
▲JTBC <옥씨부인전>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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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형성돼 조선 제10대 성종 이후로 널리 정착된 유향소는 시·군·구 의회나 자치단체장 자문기구와 비슷했다. 지역 사대부들이 주축이 된 유향소는 수령의 보좌기관으로서 지역 행정에 대한 자문을 제공했다. 그러면서도 관청의 비위를 규찰하고 수령을 견제하는 기능을 함께 수행했다.
<옥씨부인전>에서는 후자의 기능이 크게 강조됐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두 가지 다 크게 작용했다. 이와 더불어, 지역민들에게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전파하는 것도 유향소의 역할이었다. 불교나 무속에 치우친 조선시대 민중들에게 유교적 가치를 보급하는 것이 이들의 몫이었다.
16세기 초반의 걸출한 개혁가인 조광조의 죽음을 추모했다가 기득권층의 미움을 사서 훗날 유배를 가게 된 선비가 경상도 성주목 출신인 이문건(李文楗)이다. 1527년에 사면된 그는 문과에 급제해 주상 비서실인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거쳐 정6품 이조좌랑, 정3품 승문원 판교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중종의 다음 다음인 명종 때 또다시 유배를 당해 고향 성주로 가게 됐다.
그가 남긴 <묵재일기>에서도 유향소의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가정(嘉靖) 33년 10월 14일(양력 1554년 11월 8일) 기록에는 제방 축조 문제로 인한 지역 내 갈등이 서술돼 있다. 둑을 쌓으면 피해가 발생한다는 민원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이때 성주목 관아는 유향소 측이 현장을 살펴본 뒤 처분을 내리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유향소를 통해 반영되는 지역 유지들의 의견을 참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국가가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되돌려받는 환곡행정 같은 분야에서도 유향소와 수령은 협력했다. 2021년도 <민족문화논총> 제79집에 실린 백지국 영남대 강사의 논문 '17세기 창원 유향소의 운영 실태'에 따르면, 유향소는 환곡 납부 기한을 늦춰달라는 민원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환곡행정에 깊이 개입했던 것이다.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유향소는 단순히 환곡을 배분하고 납부를 독촉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창고를 두고 환곡 수입을 통해 유향소 재정을 충당하였으며, 납부와 관련된 민원을 능동적으로 처리하였던 것이다."
이런 협력적 관계과 더불어 갈등 관계도 당연히 있었다. 중종 재위기인 1525년의 '손난직 사건'도 그런 맥락에서 발생했다. 음력으로 중종 20년 8월 13일자(1525년 8월 31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진주 생원 손난직은 그곳 유향소를 무대로 풍속 교정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진주 관아와 마찰을 일으켜 북쪽 최전방으로 강제이주되는 입거(入居)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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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향소의 풍속 교정은 지역민들에 대한 통제권 강화와 연결됐다. 그래서 수령의 지방 통제와 충돌할 소지가 있었다. 지방당국이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풍속 교정이 손난직을 중심으로 진주 유향소에서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자 진주 관아에서 반격이 나왔다. 위 실록은 진주목 관아는 "수령을 고발한다, 못 되게도 송사를 좋아한다"며 손난직을 비판했다. 진주목은 이런 논리를 앞세워 손난직을 비판하고 사법적 올무를 씌웠다.
유향소와 중앙정부의 갈등이 깊어지면, 경우에 따라 내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런 비상사태 하에서 유향소 양반들이 반군을 지지한 사례들도 있다.
1978년도 <전북사학> 제2집에 수록된 김상오 전북대 교수의 논문 '이시애의 난에 대하여(상)'는 세조 집권기인 1467년의 이 반란이 크게 확산된 배경 중 하나를 유향소에서 찾는다. "물론 이 난이 이시애의 개인적인 야심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겠으나, 함경도 제읍(諸邑)의 각 유향소를 중심으로 하여 크게 확대"되었다고 설명한다.
홍길동의 반란이 충청도 등에서 큰 반향을 얻은 것도 유향소의 협력 때문이었다. 연산군 6년 12월 29일자(1501년 1월 18일자) <연산군일기>는 농사를 지도하는 권농과 지금의 이장인 이정들이 유향소 간부들과 함께 홍길동 반란에 동조하거나 묵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향소는 국가의 지방행정을 돕기도 했지만, 때로는 이시애나 홍길동 같은 인물들을 돕기도 했다. <옥씨부인전>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이었던 것이다.
<옥씨부인전>에서는 유향소가 부정적으로만 묘사되지만, 이 기구는 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역기능과 더불어 수령에 대한 견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순기능도 수행했다. 때로는 이시애·홍길동 등을 돕는 체제 파괴적 기능도 보여줬다. 이처럼 여러 측면을 갖고 있으므로, 유향소에 대한 사극의 균형잡힌 묘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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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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