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인생세탁소>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03.
그중에서도 엄마와 딸 사이의 오래된 감정은 이 영화를 지지하는 하나의 중요한 서사다. 두 사람은 가족이지만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는 아니다. 옥희는 은영의 새엄마다. 가정을 버리고 떠난 친엄마의 자리를 대신해 왔다. 경식 역시 옥희를 따라 이 집에 들어왔다. 은영은 옥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그가 자신을 부엌데기 취급이나 했다고 믿고 있고, 육지로 가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던 자신 대신 친아들만 서울에 보낸 일에 대해서도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친엄마에게 지금까지 돈을 갖다 바친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어떤 방법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충족. 그 사랑은 스스로는 발전시킬 수 없는, 관계로부터 시작되는 종류인 것이다.
옥희는 단 한 번도 은영의 오해처럼 편애하거나 함부로 대한 적이 없다. 할 만큼 최선을 다했고, 다른 뜻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아들을 서울에 보낸 일 역시 입시 때문이 아니라 치료 때문이었으며, 당시 섬을 떠나고 싶어 했던 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 나름대로 배려했던 것으로 은영의 오해다.
40년 물질을 하고도 하군에 머물 정도로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매일 악몽과도 같은 바다로 나갔던 것 역시 가족을 위한 희생에 가까웠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자리에 대한 책임 같은 것. 그와의 첫 만남에 남겨진 추억, 매립지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빌려준 일과 그 돈을 전부 갚을 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찾아온 남편의 마음을 닮았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이제 아빠의 유산인 세탁소로 이어진다. 다시 문을 열고 조금만 잘 운영하면 권리금을 받고 가게를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은영과 그런 일에 대한 마음은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옥희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딸은 겉으로나마 가게를 다시 정리해 세탁소를 직접 운영하고자 하는 뜻을 보인다. 어차피 그동안 받은 것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자신의 몫이라도 챙겨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엄마는 그 모습을 지켜본다.
04.
"이런 곳이 있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숨을 쉬는데."
이처럼 여러 갈등 상황이 제시되며 극이 나아가는 도중에 감독의 믿음처럼 자리하는 장면들이 있다. 과거의 유산을 바라보는 단정한 태도와 애틋한 마음이 담긴 자리다. 아빠가 남긴 세탁소를 기억하는 마음이 대표적이다. 돈으로만 평가되는 지금과 달리 보이지 않는 여러 의미가 있었던 공간.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기도 했고, 누군가의 안식처이기도 했던 곳. 어떤 이는 아빠의 손길이 닿은 옷을 입고 운수 대통을 했다고도 했다. 켜켜이 쌓인 시간과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는 공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편의점, 자전거, 딱밤 내기 등의 소재를 통해 의부 조카인 준서와 은영이 만들어가는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이 장면들은 영화의 차가운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움막처럼 느껴진다. 이 순간들은 인물 사이의 유대 관계를 쌓아가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혈연을 넘어서는 가족의 의미를 되찾고 날을 세우던 이들이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관객들에게는 한숨 돌리며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순간이 된다.
대비(對比)다. 이런 장면들이 있기 때문에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현실의 문제들이 더욱 또렷하게 그려진다. 탑동의 개발과 매립에 맞서 싸운 이들이 있기에 그 일이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하다. 결과적으로 어떤 장면을 마주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다. 어느 것도 맞서 세워지지 않은 곳에는 그저 사라지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인생세탁소> 스틸컷서울독립영화제
05.
끊임없이 이어진다. 삶의 찬란한 순간도, 불안하고 안타까운 순간도. 어느 하나 영속하지 못하고 자리를 바꿔가며 아우성을 친다. 저 갑옷이 욕심만 덕지덕지 묻은 자신의 모습 같다며, 은영은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엉덩이를 퍼지르고 앉아 목 놓아 운다.
이제 와 자신의 욕심을 부끄러워하고, 아버지가 남긴 세탁소와 마을 어귀의 풍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마음을 달리 먹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깨닫고 체득하며 삶의 의미를 써 내려갈 수 있게 된다. 은영도 이제 안다. 지켜낼 수 없어 떠나보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지키고자 애를 써야 하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재 가운데 하나인 풋감으로 염색한 갈옷에는 그런 우리의 삶이 고여 있다. 오랜 시간 땅속에서 숨 쉬고 난 뒤에야, 오랜 세월을 입고 입을수록 제 색을 찾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개발과 변화의 시대에서 빠르게 변하는 일 이면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이 이 영화 <인생세탁소> 속에 녹아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들 모두가 잠깐이나마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머물던 장소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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