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박무진 역할을 맡았던 배우 지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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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뉴스를 처음 들은 순간은 앞으로도 잊기 힘들 것이다. 10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지 못하듯이. 뉴스를 읽으며 나는 입으로 한음절 씩 조용히 발음해 보았다. 계, 엄. 그 계엄. 80년 광주의, 48년 제주의,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계엄. 왜? 무엇 때문에?
서사를 구축할 때 악역의 매력은 너무나 중요하다. 갈등이 이야기를 끌어나가므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매력적이고 이유가 신선할 때 이야기가 힘을 받는다.
반면 주인공은 강직하다. <60일, 지정생존자>는 특히 그래야 했다. 주인공이 복잡하지 않고 선량하니, 이야기를 끌어가려면 갈등을 매력적으로 제시할 악역이 필요했다. 그래서 테러의 배후 인물 중 하나이자 차기 대통령 주자로 묘사된 오영석(이준혁 분) 캐릭터에 많은 설정이 들어갔다. 해군 출신이며, 젊고 수려한 미남에, 국가가 군인을 지켜주지 않았다는 원한을 품고 있고, 권력의지가 강하며, 미술에 취미가 있고, 해전 당시의 상처가 몸에 남아있고, 지역을 초월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등등. 시청자들이 미워하려다가도 헛갈리게끔. 좋아하다가도 멈칫 하게끔.
우리는 늘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궁금해 하니까, 참신한 답을 주기 위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악의 참신성에 골몰하게 된다. 아니면 평범한 악을 참신하게라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건 이야기의 논리다.
현실에서의 악은 그렇지 않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에 대해 '악의 진부함'을 이야기한다. 인류사적 비극에 대해 우린 어떤 의미라도 부여하고 싶어 뭔가 색다른 이유를 찾는다. 그러나 대개 그렇지 못하다. 지독한 비극의 이유는 지독하리만치 진부하다. 그저 명령에 따랐다거나, 그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거나.
계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독하게 진부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시대와 맥락을 벗어난 나머지 진부함이 오히려 신선한 지경이었다. 내 상상을 뛰어넘었지만 참신해서가 아니었다. 내 상상에서 폐기된 진부함이었다. 그 진부함은 어떤 괴멸적 결과를 불러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참신함으로 그 결과를 막아낼 수 있을까.
난 <60일, 지정생존자>가 한국 현대 정치사에 대한 은유가 되길 바랐다. 드라마 내적 이유에 의해 제목과는 달리 30일의 여정을 다루는 이야기이지만, 그 30일 안에 한국 현대 정치사의 면면을 대입해볼만한 우화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드라마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박무진 역할을 맡았던 배우 지진희와 경호부장 강대한 역할을 맡았던 배우 공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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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의 등장도, 계엄지도도, 테러도, 권한대행의 행정부도 그런 이유에서 촘촘히 구성됐다. 그런데 지난 일주일 동안 <60일, 지정생존자>는 우화도 은유도 아닌 그저 성긴 직유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친위 쿠데타의 진부함이 새롭고자 했던 드라마의 노력도 부질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내 마음 속에 계속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권력과 민중의 본질
에 대해 냉소적으로 일갈하는 오영석(이준혁 분)에게 되묻는 박무진(지진희 분)의 말.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리고, 차영진(손석구 분)이 대선에 나가기 위해 권한대행을 퇴임하는 박무진의 연설을 위해 만들어낸 문구.
'마침내 우리의 자부심, 대한민국'
정말로 이런 모든 문제들을 정치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묻는 차영진에 대해 박무진이 하는 대답.
정치는 신이 부여한 모든 고통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대답이니까요.
문득 다시 깨닫는다. <60일, 지정생존자>의 주인공은 모든 시민을 비추는 거울이었다는 것을. 박무진 권한대행은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시민이 갑자기 행정부의 수반이 되었을 때 겪는 고뇌와 선택의 시간을 다른 시민들에게 대리 체험하게 하기 위한 매개였음을. 박무진은 한주승(허준호 분) 정책실장에게 묻는다.
누군가는 테러를 저지르고, 또 누군가는 그 테러를 막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존재일까요. 같은 나라이긴 한 걸까요? 한실장님께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이에 한주승은 그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현재의 권한대행인 박무진에게 있는 것 같다며 되묻는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박대행?
수많은 냉소를 뚫고 다시 시민의 광장이 열렸다. 지금은 시민 하나하나가 박대행으로 은유된 지정생존자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시끄러운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를 서로 묻고 답하기 위해. 시민 모두가 대한민국의 지정생존자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우리의 모색이야말로 참신한 이야기의 재구성을 가져올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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