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떠난 그녀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김성호의 씨네만세 897] <러브레터>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겐키데스카, 와타시와 겐키데스(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영화를 한 편만 꼽으라면 역시 이 대사가 나오는 영화지 않을까 싶다.

사반세기가 흘렀어도 전혀 퇴색되지 않는 명장면, 명대사를 낳은 <러브레터>말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오즈 야스지로·이마무라 쇼헤이 등 내로라하는 거장을 여럿 배출한 일본 영화계지만, 이와이 슌지만큼 한국에 널리 알려진 감독은 없다. 세기말 아날로그적 감수성으로 잊혀가는 것의 아름다움에 주목한 그의 영화는 일본을 넘어 한국에서까지 신드롬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4월 이야기>·<하나와 앨리스>·<릴리 슈슈의 모든 것> 등 여러 작품을 찍은 이와이 슌지지만, 그의 대표작을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러브레터>다. 이 영화가 거둔 성취가 남다르고, 영화 안에 담긴 아름다움이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을 만큼 정결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오늘 다시 본다 해도 촌스러움이 아닌 예스러운 정취가 느껴진다.

죽은 애인의 옛 주소로 보낸 편지

러브레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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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레터>는 동명이인, 즉 이름이 같은 이들로 인해 빚어지는 우연을 담는다. 영화는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분), 그녀가 사랑했던 연인 후지이 이츠키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내며 시작된다.

이십 대 중반 청춘의 한 시절을 지나고 있는 히로코가 헤어진 연인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이츠키가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더없이 사랑했던 남자를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으니 히로코의 마음이 오죽할까. 우연히 발견한 죽은 애인의 옛 주소로 마음 담은 편지를 보내는 건 차라리 필연이라 해도 좋겠다.

영화는 히로코가 띄운 편지가 이츠키가 한때 살았던 집에 사는 이, 그러니까 전혀 관계가 없는 누구에게 전해지는 것쯤으로 그치지 않는다. 놀랍게도 편지를 받는 건 후지이 이츠키다. 히로코의 죽은 애인이 아닌, 그와 이름이 같은 또 다른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분)다. 알고 보니 두 이츠키는 같은 중학교, 같은 반 급우였던 사이다. 졸업 직전 전학을 간 애인 대신 같은 이름의 이츠키네 집주소가 앨범에 잘못 적혔진 것이다.

십 년의 시간을 건너 드러나는 진실

러브레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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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십 년의 시간을 건너 두 이츠키의 학창 시절을 비춘다. 편지를 받은 이츠키가 히로코에게 저와 같은 이름을 가졌던 급우에 대한 기억을 전해준다. 한창 이성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나이, 남녀가 같은 이름을 가졌으니 주변의 아이들이 가만히 놓아둘 리 없다.

짓궂은 놀림이 지긋지긋했던 이츠키가 죽은 이츠키에 대해 이렇다 할 좋은 기억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츠키가 떠올리는 여러 사건을 통해 둘 사이에 미처 피어나지 못했던 감정이 있었단 걸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섬세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러브레터>의 멋은 지나간 시간을 다시금 비추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애인을 잃고 상심한 히로코가 과거와의 대면을 통해 슬픔을 떠내려 보내고 나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 상실과 성장의 절묘한 교차가 인생의 일면을 돌아보게끔 한다. 십 대 중반 소년이 남몰래 품었던 마음이 바깥으로 비어져 나오지 못하고 갈무리되는 모습이 설득력 있게 표현된다. 그 자취를 무려 십 년이나 지난 뒤에 되짚어나가게끔 한 것 역시 매혹적인 설정이다.

너무 일찍 떠난 아까운 배우

러브레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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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지 못하였던 진실, 누군가가 저를 마음에 품었다는 걸 뒤늦게 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카야마 미호는 여자 후지이 이츠키의 둔감하면서도 진실한 반응을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그녀는 여자 이츠키와 히로코를 함께 연기하는데, 꼭 닮은 외양에도 그 분위기가 절묘하게 달라져 지금 다시 봐도 놀라울 정도다. 둔감한 이츠키와 섬세한 히로코를 함께 연기하면서도 둘 사이의 닮아있음을 절묘하게 내보이는 솜씨, 또 모두가 기억하는 설원 위에서 지난 아픔을 털어내는 인사를 던지기까지의 변화도 탁월하게 소화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구성이 빼어나고, 이와이 슌지의 특장점이라 해도 좋을 영상미와 음악의 아름다움 또한 대단하다. 그중에서도 <러브레터>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명작이 된 데 있어 나카야마 미호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1인2역의 연기를 그녀는 너무나 적절하게 소화해냈다.

그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지난 6일 세상을 떠났다. 1970년생으로 이제 겨우 쉰 넷, 아까운 나이다. 그는 <러브레터>가 한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이후 한국영화에도 몇 차례 출연하고 자주 내한까지 했다. 가수 출신 배우 중에선 손꼽힐 만큼 안정된 연기를 보였고 음악활동 또한 꾸준히 이어왔다. 2025년 1월 1일, <러브레터>는 아홉 번째 재개봉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러브레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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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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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