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엔터업계에서 작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들이 어떻게 변화를 일궈내고 흐름을 변화시켰는지, 또 K엔터테인먼트 산업 내에서 지속 가능한 변화와 혁신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작은 거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편집자말]

 에스파 "Armageddon" MV 中
에스파 "Armageddon" MV 中SM ENT.

"우리 딸, 드디어 최고의 감독으로 인정받았네."

지난 11월 23일,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건 엄마에게 그는 짧게 답했다.

"엄마, 난 원래 최고였어."

이날, 일본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2024 마마 어워즈'(2024 MAMA AWARDS)에서 베스트 뮤직비디오에 그룹 에스파(aespa)의 '아마겟돈'이 호명됐다. 윤승림 리전드필름 감독이 연출한 뮤직비디오였다. 후보에 오른 다섯 개의 뮤직비디오 가운데에는 그가 연출한 또 다른 뮤직비디오인 아이브(IVE)의 '해야'도 포함돼 있었다. 올 한 해 발표된 수많은 뮤직비디오, 그중 딱 다섯 작품이 후보에 올랐는데 그중 두 편이 윤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엄마에게 호기롭게 말한 '최고'라는 표현은 어찌 보면 당연한 평가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진짜 최고라고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어떤 아티스트의 어떤 작품(뮤직비디오든)이든 다 최선을 다해왔다는 뜻"이라며 "사실 조금은 두려웠다"고 말했다. 윤 감독이 이번 수상으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혼자 조용히 되뇐 이유다. 그는 오랜 시간 지켜온 '누군가의 인정, 외부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자'는 다짐도 재차 떠올렸다고 전했다. 동시에 그가 엄마에게 한 말은 스스로를 향한 위로의 답이었다. 매번 열심히 달려온 과거의 윤승림이 오늘의 윤승림에게 건넨 말이었다.

가장 뜨거운 감독

 윤승림 감독
윤승림 감독리전드필름

지난 11월 28일 서울 홍익대학교에서 윤승림 감독을 만났다. 장동주 감독과 '리전드필름'을 이끄는 윤 감독은 현재 케이팝에서 가장 뜨거운 감독으로 꼽힌다. 2016년에 설립된 리전드필름은 케이팝 뮤직비디오 업계에서 매번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고 평가받는 대표적인 프로덕션이다.

리전드필름은 세븐틴(Seventeen), 아이브(IVE), 에스파(aespa), 있지(ITZY), 트와이스(TWICE) 등 각기 다른 아티스트의 매력 포인트를 정확히 담아내고, 뮤직비디오 내 이야기 구성도 탄탄해 케이팝 뮤직비디오를 '종합예술' 단계에 올리는 데 한몫했다. K팝 팬들이라면 뮤직비디오 세트만 보고도 리전드필름 제작이라는 걸 알아차릴 정도다. 레전드필름의 도전은 CG, AI(인공지능) 등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것부터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을 함께 일한 스태프의 이름으로 장식하는 것까지 작품의 내외부를 따지지 않고 이뤄졌다. 이곳에서 윤 감독은 연출·촬영·후반 작업 등 크리에이티브와 관련된 일을 담당한다.

이효리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뮤직비디오 감독을 꿈꾸고, 홍익대학교 미대를 다니며 공부보다 재밌는 것을 찾아다니다 퇴학 직전까지 경험한 사람. 조감독 생활을 거쳐 지난 2016년 리전드필름을 공동 창업하고 케이팝에 자신의 지문을 남기고 있는 창작자. 일의 변동성과 업무 강도 때문에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감독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윤 감독은 오는 3월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인터뷰 당일, 그는 홍익대 미대 총학생회에서 주최한 '연사 초청 콘서트' 중 한 명으로 강단에 섰다. 출산 전까지 해야 할 4개의 작업과 관련한 각종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터였다. 강연 후 인터뷰를 했고, 다음 날 오전에는 촬영 장소 헌팅을 위해 제주도로 떠날 예정이었다.

임신 6개월이 아니더라도 벅찬 일정을 두고 그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상한 사명감이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출산·임신이 드문 업계에서 또 설사 있더라도 출산 후 복귀한 여성 감독이 부재한 환경에서 인간 레퍼런스(참고자료)가 된 거 같다"고 말했다. 언제나처럼 일도 잘하고, 출산 후 업계에 복귀하는 좋은 선례로 남기 위한 고군분투 같은 거였다.

윤승림의 '한 끗'

 지난 4월 공개된 그룹 아이브(IVE)의 뮤직비디오 '해야' 티저 영상
지난 4월 공개된 그룹 아이브(IVE)의 뮤직비디오 '해야' 티저 영상스타쉽엔터테이먼트

보통 케이팝 뮤직비디오는 아무리 길어도 4분을 넘지 않는다. 이 시간 내에 음악과 아티스트의 콘셉트를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게다가 팬들은 자신의 스타가 음악과 함께 시각적으로 어떻게 전달되는지 누구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고 평가한다. 윤승림 감독은 케이팝 뮤직비디오를 '대중을 향한 플러팅(flirting)'이라고 정의했다.

"뮤직비디오는 대중을 향해 아티스트의 매력을 어필하는 수단이라고 봐야 해요. 그룹의 세계관과 아티스트의 매력, 곡의 무드를 짧은 시간 안에 보여줘야 하거든요. 아티스트의 기존 이미지를 아예 벗어나서도 안 되지만, 또 비슷한 걸 보여줄 수는 없죠. 동시에 너무 새로운 걸 시도해 아티스트의 기존 콘셉트에서 벗어나면 안 되고요. 뭔가 다르지만, 어색하지 않도록 대중에게 새로우면서 낯설지 않은 '한 끗'을 보여주는 작업이죠."

그렇게 '2024 마마 어워즈'에서 수상한 에스파의 '아마겟돈'은 에스파를 수식하는 표현인 '쇠 맛'을 살리면서 어둡고 기괴한 오브제들, 멤버의 몸에서 돋아나는 날개 등으로 시각적 변화를 추구했다. 아이브의 '해야'는 어떤가. 기존의 케이팝과 다른 새로운 방식의 티저(teaser, 짧은 요약본)를 만들어달라는 소속사의 요구에 족자를 펼치는 듯 가로로 긴 비율로 신선함을 추구했다.

"사실 아이브가 새로운 곡을 발표할 당시 연예계에 여러 이슈가 있었어요. 그래서 눈길을 끌려면 좀 더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이 필요한 상황이었죠. 결국 답을 내린 게 뮤직비디오의 비율을 바꿔보자는 거였어요. 기자님은 이 말이 어떻게 들리세요? 누군가에게는 '그게 뭐야' 정도일 수 있지만, 어쨌든 그 당시 신선하다며 이목을 끌 수 있었어요. 제가 강조하는 '한 끗'은 결국 이런 거예요. 기존의 창작물에서 중복되었던 것들을 찾아내 이 부분은 빼고 나만의 하나를 더하는 거요."

최근 모든 영역에서 활용도를 고민하는 AI 활용도 비슷하다. 윤 감독은 AI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규정했다. 다만, 절대적인 팬들의 지지를 받는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는 만큼 AI를 활용한 이유를 아티스트의 팬, 대중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AI를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건 지금 상황에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피할 수 없으니까요. 저는 현장에서 선장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수십 명의 스태프를 지휘하고 우리가 산으로 가지 않고 좋은 결과를 이끌도록 지휘하죠. AI도 마찬가지예요. 현장에서 여러 스태프와 소통하고 디렉팅하는 것처럼 제가 다뤄야 할 하나의 영역일 뿐입니다. 다만, 팬과 대중에게 왜 이 기술이 들어갔는지 이 기술을 활용함으로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얼마나 더 빛날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그 역시 뮤직비디오를 총괄하는 저의 역할이고요."

뮤직비디오라는 창작

 윤승림 감독의 연출 현장
윤승림 감독의 연출 현장리전드필름

기술의 활용, 자기만의 '한 끗'을 확신하며 찾은 듯 보이는 그의 성장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불안과 확신'이라는 상반된 답을 내놨다.

"저는 모든 작품에 정말 똑같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이 작업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했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은 시간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저돌적인 삶을 이어가면서 잃은 것도 있어 불안함에 시달리기도 했어요. 사실 제가 만든 뮤직비디오들은 그 순간에 가장 새롭게 대중에게 다가가는 동시에 아주 잠깐의 시간만 지나면 헌것, 오래된 것이 돼요. 너무나 많은 새로운 것들이 항상 대중을 유혹하니까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최선을 다해 작업하되 또 빨리 털어내고 모드를 전환해 다른 작품에 몰입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수십 명의 스태프와 함께 만든 내 새끼 같은 작업물을 제대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도 있죠."

윤 감독은 조심스레 케이팝 뮤직비디오 창작자들의 현실을 전했다. 현재 이들은 뮤직비디오의 조회 수가 수천만을 달성해도, 새로운 콘셉트와 기술을 활용해 시각적으로 노래를 구현해도 저작권이나 창작권과 관련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윤 감독이 자신이 제작한 뮤직비디오 엔딩 크레디트에 스태프의 이름을 명시한 건 그 나름의 '최소한의 예우'였다.

"케이팝 뮤직비디오는 종합예술의 집약체예요.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모순적인 건 제가 어디에서든 창작자로 불리지만 동시에 온전히 제 창작의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작은 소망이 있다면 후배들이 자신의 창작, 연출을 온전히 인정받고 존중받는 거예요. 어찌 보면 창작 주체자로서 우리의 당연한 권리죠. 뮤직비디오 감독인 저뿐 아니라 아티스트를 스타일링하고 안무를 짜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 모두가 비슷해요. 모두 그 사람이기에 가능한 창작의 영역인데, 그 가치는 제대로 존중받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서글픈 현실입니다."

그는 "운이 좋아 케이팝 업계에서 알려진 것뿐"이라면서도 "모든 뮤직비디오, 내 작품에 당당하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고는 재차 케이팝 업계의 다양한 '창작자'의 현실을 언급했다. 자기가 연출한 뮤직비디오를 '예술인 척하는 상업적 미디어'라고 표현하면서도 그와 업계의 후배들이 그려갈 미래가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줄 아는 창작자였다.

인터뷰 며칠 뒤, 그의 또 다른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11월 30일 '2024 멜론 뮤직 어워드'에서 그가 연출한 아이브의 '해야 (HEYA)' 뮤직비디오가 '베스트 뮤직비디오' 상을 받았다. 한 해의 가장 큰 음악 축제이자 시상식이라고 알려진 '2024 마마 어워즈'와 '2024 멜론 뮤직 어워드'에서 각기 다른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로 '올해 최고'를 입증한 것이다. 축하 메시지에 "내년에도 열심히 달릴 거예요"라고 화답한 그는 현재 케이팝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독이 확실했다.
윤승림 에스파 아마겟돈 아이브 해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