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시드 레인: 죽음의 비>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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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미문의 비상상황이지만, 할리우드 유사 장르와 달리, 정부 역할과 기능은 위태롭긴 해도 여전히 가동되는 중이다. 군대와 경찰은 지역을 통제하고, 민간인 대피 시설과 구호소를 꾸려간다. 할리우드 영화라면 대개 믿을 건 우리 식구밖에 없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공공서비스는 무기력할 만큼 순식간에 초토화되지만, 유럽의 시스템은 그 정도로 허술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사회적 참사 때마다 반복되는 상상 이하 대처에 절망하던 한국 관객에겐 제법 신선한 풍경일 정도다.
그러나 미셸이 보호관찰에 이르게 된 과정으로만 보였던 노사분쟁은 복선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미셸은 공권력과 사회 체제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다. 동료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지만, 경찰과 법원은 사용자 편만 들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고 여긴다.
그는 노동계급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하지만, 투쟁의 대가로 이혼당하고 직장을 잃은 것에 대한 분노만 남았다. 그러니 매사에 공격적이고 유사시에 준수해야 할 공공규범 어기는데 거리낌이 없다. 영화 속에서 그 울분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지만, 감정에 치우치고 극단적 이분법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미셸의 편향은 자신이 지키려는 이들과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물론, 편견에 기초한 판단으로 일행을 위험에 빠지게 만든다.
전처와 딸은 미셸에게 의지하지만, 한편 이게 최선일까, 과연 제대로 보호할 수 있나 줄곧 의구심을 품는다. 세상 물정 잘 알고 유력한 지인들이 많은 오빠(외삼촌)에게 의지하는 게 더 낫겠다는 기대감은 곧 남편(아빠)에 대한 푸념으로 전환된다. 그에 대한 미셸의 대응은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이다. 마음을 모아도 시원찮을 판에 비아냥대거나 적대감을 표명하며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미셸이 계속 감정적 판단을 내리는 바람에 불신은 한층 심각해진다. 물론 그의 가족을 수호하려는 의지는 진정성을 의심할 게 없는데도, 정작 본인이 지키려는 이들은 그의 진심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 미셸의 독선과 아집,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이를 조장한 셈이다.
그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보이는 이기적 태도는 가족들에게 신뢰 대신에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그로선 가족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획득하고, 외부의 위험요소를 배제하기 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결단이지만, 문명사회에 익숙한 다른 가족에게 미셸의 난폭한 태도는 공포와 의혹으로 비칠 따름이다. 가족을 먹일 식료품을 남의 집에서 약탈하거나 타인의 차량을 무단으로 절취하는 건 미셸에겐 부자의 것을 돌려받는 셈이지만, 타인에겐 약탈자로만 비칠 뿐이다.
아내와 처남에 대한 계급적 갈등에 이어,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던 딸 셀마와 세대갈등도 만만찮다. 부녀관계는 기본적으로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딸은 가족으로서 유대관계를 기본적으로 형성하면서도 서로 너무 오래 떨어져 지냈다. 이혼한 전처와 유복한 처가에 대한 억하심정이 있다 보니, 아빠는 딸에게 엄마와 외삼촌 비난에 여념이 없고, 청소년 세대가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긍정적으로 참여하는 기후위기 대응을 부정한다. 노동자-자본가 대립을 희석하려는 '부르주아의 음모'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다. 반대로 딸은 아빠의 무조건 강요하며 윽박지르는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상당수 관객에게 셀마는 흔히 재난영화에서 반드시 등장하게 마련인 '민폐' 캐릭터 정도를 가뿐히 초월해 '발암'의 근원으로 보일 판이다. 그만큼 셀마는 그래도 어떻게든 자식을 지키려는 마음에 협력하는 아빠와 엄마는 물론, 자신까지 굳이 안 겪어도 될 위기에 수시로 빠지게 만든다.
그렇게 자기 입장을 발악하듯 토해내지만, 아직 어린 그로선 막상 난국에 처하면 그저 부모에게 구해달라 소리치는 것 이외엔 아직 방도를 모른다. 그런 상황이 사실 현실이라면 너무나 당연할 테지만, 자식을 지키려는 부모 입장에 공명한 관객들이라면 화면 속으로 뛰어들어 딸의 멱살을 쥐고 싶어질 지경이다.
위기의 징후는 사회적 불신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