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한국단편영화상 관객상 수상작 <빼고>
포스트핀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나는 엄마 하나면 돼."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을까. 적어도 한 가지는 아닐 것 같다. 몇 편의 영화만 떠올려봐도 그렇다. 처음부터 감정을 터뜨리며 침잠하는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이야기가 있고, 서서히 쌓여가는 서사 위에서 촉발점을 찾아내는 작품도 있다. 감정의 집합을 뜻하는 의미로 단어 하나를 택해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결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영화 <빼고>를 연출한 심이안 감독은 프레임 위에 감정을 인위적으로 축적하지 않는다. 그저 화면 곳곳에 당위를 가진 장면을 흩어놓을 뿐이다. 그리고 관객의 경험을 빌려온다. 여기에서 경험을 빌린다는 뜻은 의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보편적 상황과 감정을 이용한다는 뜻이다. 이 작품에서는 소중한 존재의 상실이다.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보라(조아영 분)에게는 엄마 진실(오지후 분)은 소중한 대상이다. 엄마가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영화에서 보이는 것으로는 보라에게 가족의 유일한 존재인 진실은 더욱 그렇다. 오롯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더 불편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격의 없고 편한 사이라서 되려 감정을 쌓아두게 되는 사이.
상의도 없이 오래된 짐을 마음대로 자신의 방에 가져다 놓은 엄마의 행동이나, 말도 없이 가져다 쓰는 화장품에 화가 나는 것도 그래서다.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시끄러운 노랫소리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그녀를 매일 밤 품에 안고 온기를 채워주는 엄마를 오래 싫어할 수는 없다.
02.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른 다음 장면에서 보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오랫동안 환기도 하지 않은 듯한 어두컴컴한 집. 오래 전의 장면으로부터 거의 달라지지 않은, 먼지만 겨우 내려앉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대로인 공간 안에서 무기력한 모습이다.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다. 엄마와의 사소한 트말썽으로 짜증을 내기는 했지만 이전에 보였던 활기도 모두 잃은 듯한 느낌이다. 사촌 언니 혜린(이승윤 분)이 갑갑한 현관문을 열고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주고, 오랜 단골처럼 보이는 슈퍼마켓 주인아주머니(안민영 분)의 걱정이 그 자리를 겨우 채운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겉모습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몸무게가 105kg으로 측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녀 역시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다시 재보지만 숫자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비현실적으로 표현되는 장면이다. 진짜 몸무게는 중요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장난처럼 반복해 왔던 엄마와의 몸무게 재기. 이 지점에는 상실한 존재와의 비물리적 경험과 기억, 감정 모두가 놓인다. 지금 보라는 엄마를 잃은 직후의 상태로 집안을 유영하고 있다.
잃어버리고 난 후에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느껴지지 않던 것이 피부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엄마의 상자, 자신이 알지 못했던 엄마의 지난 여러 모습을 보라가 알게 되는 것 역시 그때가 된다. 쓸모없는 짐처럼 밀어내려고만 했던 상자 속에서 엄마의 흔적이 쏟아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