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래바람> 스틸 이미지
㈜영화특별시SMC
어릴 적, 명절에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면 항상 씨름대회 중계를 볼 수 있었다. 권투처럼 유혈이 낭자한 폭력적(!) 격투기도 아니고, 구기 종목처럼 승패가 결착이 날 때까지 몇 시간씩 봐야 하는 수고도 덜한 씨름시합은 늘 우선순위는 아닐지언정, 달리 볼 게 없을 때 차선책으로 선택받곤 하던 스테디셀러로 기억한다.
그 시절에는 학교 운동장에도 모래를 두툼하게 덮은 씨름장이 종종 부설돼 있곤 했다. 운치 있게 줄다리기할 때 쓰던 굵은 새끼줄로 테두리를 구분한 그곳에서 체육 시간에 씨름 대결을 벌이고, 마치고 나면 여기저기 묻은 모래를 털어내느라 곤욕을 치르면서도 뭐가 재미있는지 열심히 승부를 겨뤘던 추억이 남는다. 서로 '내가 000다!' 하며 당대에 유명하던 천하장사들을 자처하곤 했다.
한창 씨름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던 당시, 요즘 체육계 표현대로라면 'GOAT(Greatest Of All Time)'로 누구나 인정하던 이만기가 있었고, 늘 두세 번째, 만년 준우승 위치에 머물렀지만, 종종 다크호스로 활약하며 각기 다른 개성이 뚜렷했던 이준희와 이봉걸이 바로 아래 위상을 차지했었다. 몇 해 후 요즘 세대에는 예능인의 대명사가 됐지만, 두 번째 GOAT에 근접했던 이가 강호동이다.
2000년을 전후해 씨름의 인기는 쇠락하고, 좀 더 화끈한 이종격투기 아니면 온라인 접속환경의 비약적 변화 덕분에 해외 스포츠 관전으로 관심이 이동했다. 그렇게 씨름은 변방으로 밀려난 상태다. 간혹 방송에서 중계되거나, 지방 도시에서 대회가 열리더라도 중장년층 이상에 국한된 관객으로 그저 명맥만 유지하는 낡은 인상이 굵직하게 새겨졌다.
그런데 근래 방송가에서 화제가 되는 여성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여자씨름의 스타들이 알려지면서 엄연히 존재하는 씨름판의 한 축이 이목을 끌며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영화 <모래바람>은 그런 여자씨름의 현황을 소개하고 응원을 청하는 작업이다.
5명의 캐릭터로 풀어보는 여자씨름의 현주소
영화에는 5명의 여자씨름선수가 각자의 역할을 분담해 비인기종목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그린다. 그중 벼리가 되어주는 존재는 여자씨름의 '이만기'이자 GOAT라 할 임수정이다. 현재까지 100회 우승을 달성하며 여전히 현역 최강자 중 하나로 후배들과 봐주는 일 없이 경합하는 존재다.
그를 통해 여자씨름은 상징적으로 구현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씨름시합을 찾는 열성 노년층 팬들에겐 '여자 이만기'란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붙는 (과거와 비교하면 한없이 영락한) 현재 씨름판의 스타다.
후배들에겐 그런 임수정은 동경의 대상인 동시에 넘어설 수 없는 통곡의 벽, 하지만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세계관 최강의 경쟁자로 동시에 자리매김한다. 그런 후배 선수들이 차례로 화면에 등장해 각자의 방식으로 존경하는 선배에 대한 헌사와 마음속에 깊숙하게 품은 경쟁의식을 피력하기 시작한다. 누구는 임수정을 향한 팬심을 마치 아이돌 팬처럼 나타내지만, 누구에겐 그 이름 세 글자는 반드시 극복할 목표, 조금 세게 표현하면 '타도대상'으로 자리한다. 물론 존경심은 모두가 공유하는 개념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