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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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전쟁의 시작
본격적인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페르디난트 2세의 지나친 강경책으로 가톨릭 합스부르크 세력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 신교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연대를 모색하며 30년 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이었다.
1625년 북해의 강국이던 덴마크가 신교 국가들의 후원을 등에 업고 신성로마제국을 침공하며 '덴마크 전쟁'이 발발한다. 페르디난트 2세는 명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지휘관으로 선임하여 약 4년간의 전쟁 끝에 덴마크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1630년, 이번에는 '북방의 사자왕'으로 불리우던 구스타프 2세가 이끄는 스웨덴이 신교 연합군에 참전해 3차 '스웨덴 전쟁'이 벌어진다. 구스타프 2세는 대대적인 군사개혁과 신무기 개발에 힘입어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가톨릭 연합군에 대승을 거두며 그동안 일방적인 열세에만 몰려있던 신교 연합 측에 최초로 반전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632년 뤼첸 전투 도중 구스타프 2세가 전사하면서 스웨덴은 큰 손실을 입고 신교 연합군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을 패퇴시키며 다시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온 가톨릭 연합군은, 1635년에 프라하 조약을 맺고 전쟁을 일단 종결시키는 듯했다.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는 그동안 로마 가톨릭 국가임에도 정치적 이유로 참전하지 않고 오히려 막후에서 신교세력을 지원해왔다. 그런데 전황이 신교 측에 점점 불리해지며 합스부르크 왕가(스페인-신성로마제국) 세력에게 앞뒤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1635년 5월, 결국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여 뒤늦게 30년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바로 30년 전쟁의 클라이맥스인 '프랑스-스페인 전쟁'이다. 그 본질은 프랑스를 다스리던 부르봉 왕가와, 스페인-신성로마제국을 장악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가문 간의 유럽 패권 경쟁이었다.
프랑스의 실권자이자 추기경으로 '강철발톱의 이리'라는 별명으로 불린 리슐리외는 프랑스를 유럽의 패권 국가로 발돋움시킨 명재상으로 꼽힌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리슐리외는 오로지 자국의 국익과 패권경쟁을 위하여 종교적 신념까지 버리고 가톨릭 연합에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당시 교황은 리슐리외를 로마 가톨릭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맹비난을 퍼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재적인 전략가이기도 했던 리슐리외는 먼저 외교전으로 네덜란드-스웨덴-작센 제후국 등 여러 동맹들을 포섭하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강력한 연합군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첩보전과 공작으로 내부의 반란지원을 유도하며 안팎으로 스페인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리슐리외의 치밀한 전략과 준비 끝에 프랑스는 강대국 스페인을 '로크루아 전투'에서 대파하여 전쟁의 판도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 전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신교 연합의 핵심이던 프랑스와 스웨덴은 유럽의 새로운 패권국가로 급부상한다. 반면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이 해상패권을 상실한 데 이어, 신성로마제국 통합에도 실패하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결국 신교세력의 반란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최종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연합의 패배와 신교 연합의 대역전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30년 전쟁은 훗날 유럽의 역사와 판도를 뒤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군사적으로는 최첨단 무기전의 중요성이 확대되면서 총기와 대포 등 화약 무기 개량과 경량화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전투마다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게 되면서 전쟁의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국제전쟁의 장기화로 실리적인 외교와 연대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진 것도 중요한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