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은 유럽 최초의 세계대전으로도 불린다. 유럽 약 16개국과 140여 개의 제후령이 참전한 이 전쟁은, 30여 년간 무려 800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20세기의 2차세계대전보다도 인구 대비 더 많은 사망자를 초래했던 참혹한 비극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처음에 종교 갈등을 명분으로 시작한 분쟁은 어떻게 전 유럽을 광기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게 되었을까. 당대 유럽인들에게는 어떤 끔찍한 지옥이 펼쳐졌을까.

2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유럽 지도를 바꾼 최초의 세계대전 30년 전쟁'편을 다뤘다. 임승휘 선문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방송 장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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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영향

중세 시대 유럽은 유일한 종교였던 로마 가톨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로마 가톨릭은 1200여 년에 걸쳐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를 지배하며 '국가 위의 종교'로 군림했다.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은 '신의 대리인'으로 불리며 국왕들조차 뛰어넘는 강대한 권력을 행사했다. 당시 유럽의 중앙에 위치해 여러 민족들과 공국·제후국의 연합체로 구성된 신성로마제국(오늘날의 독일 지역과 그 인근)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원동력도, 국교였던 가톨릭을 기반으로 하는 통일성이었다.

하지만 16세기 들어 가톨릭의 부패와 반기를 든 종교개혁이 등장했다. 신성로마제국은 구교(로마 가톨릭)과 신교(개신교)로 급격히 양분됐다. 양측은 서로를 적대하며 극심한 갈등을 빚었고, 가장 강력한 구심점이던 종교가 흔들리자 신성로마제국은 분열의 위기를 맞이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30년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인물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던 페르디난트 2세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1617년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에 오르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선대의 약속을 깨고 신교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신교의 위세가 강했던 보헤미아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분노한 개신교 귀족들은 페르디난트 2세의 측근과 가톨릭 성직자들을 붙잡아서 창밖으로 내던지는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을 일으키며 신구교의 대립은 더욱 극심해진다. 1619년에는 결국 신교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페르디난트 2세 대신 팔츠 선제후국의 왕인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1619년 8월 28일, 페르디난트 2세가 황제선거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선출되면서 신교 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정당한 명분을 확보하게 된다.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의 신교 세력을 반란으로 규정해 토벌을 명령했고, 이에 프리드리히 5세는 페르디난트 2세의 거점이던 오스트리아 빈을 선제공격하면서 양측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양측은 가톨릭을 지지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군과 스페인·오스트리· 바이에른 공국 등으로, 신교를 지지하는 보헤미아와 팔츠 선제후국·사보이 왕국·영국 등으로 나뉘며 유럽 여러 나라들이 참전한 국제전으로 확대됐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첫 서막을 알린 '보헤미아-팔츠 전쟁'이다. 명분은 종교 갈등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참전한 국가들의 진짜 목적은 이권을 노린 영토 확장 전쟁이었다.

보헤미아-팔츠 전쟁은 로마 가톨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가톨릭 연합군은 보헤미아 반란을 일으킨 신교 주동자들을 처형하고 가담자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참전에 대한 보상으로 팔츠 선제후의 지위를 바이에른 공국의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하사했다. 또한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으로 유럽 중앙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스페인에게는, 신성로마제국 내의 전략적인 요충지이던 알자스를 교통로로 활용하는 걸 허가했다.

 방송 장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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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전쟁의 시작

본격적인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페르디난트 2세의 지나친 강경책으로 가톨릭 합스부르크 세력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 신교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연대를 모색하며 30년 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이었다.

1625년 북해의 강국이던 덴마크가 신교 국가들의 후원을 등에 업고 신성로마제국을 침공하며 '덴마크 전쟁'이 발발한다. 페르디난트 2세는 명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지휘관으로 선임하여 약 4년간의 전쟁 끝에 덴마크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1630년, 이번에는 '북방의 사자왕'으로 불리우던 구스타프 2세가 이끄는 스웨덴이 신교 연합군에 참전해 3차 '스웨덴 전쟁'이 벌어진다. 구스타프 2세는 대대적인 군사개혁과 신무기 개발에 힘입어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가톨릭 연합군에 대승을 거두며 그동안 일방적인 열세에만 몰려있던 신교 연합 측에 최초로 반전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632년 뤼첸 전투 도중 구스타프 2세가 전사하면서 스웨덴은 큰 손실을 입고 신교 연합군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을 패퇴시키며 다시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온 가톨릭 연합군은, 1635년에 프라하 조약을 맺고 전쟁을 일단 종결시키는 듯했다.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는 그동안 로마 가톨릭 국가임에도 정치적 이유로 참전하지 않고 오히려 막후에서 신교세력을 지원해왔다. 그런데 전황이 신교 측에 점점 불리해지며 합스부르크 왕가(스페인-신성로마제국) 세력에게 앞뒤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1635년 5월, 결국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여 뒤늦게 30년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바로 30년 전쟁의 클라이맥스인 '프랑스-스페인 전쟁'이다. 그 본질은 프랑스를 다스리던 부르봉 왕가와, 스페인-신성로마제국을 장악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가문 간의 유럽 패권 경쟁이었다.

프랑스의 실권자이자 추기경으로 '강철발톱의 이리'라는 별명으로 불린 리슐리외는 프랑스를 유럽의 패권 국가로 발돋움시킨 명재상으로 꼽힌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리슐리외는 오로지 자국의 국익과 패권경쟁을 위하여 종교적 신념까지 버리고 가톨릭 연합에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당시 교황은 리슐리외를 로마 가톨릭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맹비난을 퍼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재적인 전략가이기도 했던 리슐리외는 먼저 외교전으로 네덜란드-스웨덴-작센 제후국 등 여러 동맹들을 포섭하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강력한 연합군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첩보전과 공작으로 내부의 반란지원을 유도하며 안팎으로 스페인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리슐리외의 치밀한 전략과 준비 끝에 프랑스는 강대국 스페인을 '로크루아 전투'에서 대파하여 전쟁의 판도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 전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신교 연합의 핵심이던 프랑스와 스웨덴은 유럽의 새로운 패권국가로 급부상한다. 반면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이 해상패권을 상실한 데 이어, 신성로마제국 통합에도 실패하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결국 신교세력의 반란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최종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연합의 패배와 신교 연합의 대역전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30년 전쟁은 훗날 유럽의 역사와 판도를 뒤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군사적으로는 최첨단 무기전의 중요성이 확대되면서 총기와 대포 등 화약 무기 개량과 경량화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전투마다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게 되면서 전쟁의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국제전쟁의 장기화로 실리적인 외교와 연대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진 것도 중요한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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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후유증

하지만 탐욕이 초래한 전쟁으로 가장 큰 후유증은, 전 유럽이 쑥대밭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전쟁터가 된 신성로마제국 일대는 전 국토가 황폐해지고 시신들이 속출해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생지옥으로 변했다. 백성들이 배고픔을 참지 못해 어린아이들을 유인하여 식인까지 저질렀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끔찍한 참상이 펼쳐졌다.

유럽 국가들은 종전과 함께 1648년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 평화회의로 꼽히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다. 이에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신성로마제국내 각 제후국의 독자적인 주권 보장,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국가화 등이 이루어진다. 또한 가톨릭은 예전처럼 유럽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없게 됐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현대적인 유럽 국경선의 기반이 완성되는 것도 이때부다.

패권과 영토, 종교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유럽의 모든 중심을 뒤바꾼 30년 전쟁은 오늘날 근현대 유럽의 기틀을 만드는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물과 국가들이 뒤엉켜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전쟁의 진정한 이유는 대부분 명분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장 자크 루소의 어록은, 우리에게 시대를 뛰어넘어 전쟁의 본질에 대하여 다시 한번 고찰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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