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은 노동자(근로자)일까 아닐까.

노동당국은 최근 걸그룹 뉴진스 멤버 하니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울서부지청은 지난 20일 뉴진스 팬들이 뉴진스 멤버 하니(본명 팜 하니)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며 고용노동부에 제기한 민원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려워 행정종결했다"라고 밝혔다.

노동청은 팜하니가 체결한 매니지먼트 계약의 내용과 성질상 사용·종속 관계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 보기 어렵다면서 "서로 대등한 계약 당사자의 지위에서 각자의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는 관계에 불과해 사측의 지휘·감독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연예인은 일반적인 노동자와 달리 "일정한 근무 시간이나 근무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출퇴근 시간을 정할 수가 없는 점", "연예 활동에 필요한 비용 등을 회사와 팜하니가 공동으로 부담한 점" 등도 이유로 꼽았다.

영국 BBC 방송은 이 결정에 대해 "K팝 스타는 노동자인가? 한국은 아니라고 말한다"라며 "이 결정은 상당한 비난을 받았으나, 한국 연예계가 엄격한 일정과 치열한 경쟁으로 유명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랍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라고 전했다.

노동자 아닌 연예인의 권리 찾기

 뉴진스 멤버 하니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의 판단을 보도하는 영국 BBC
뉴진스 멤버 하니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의 판단을 보도하는 영국 BBCBBC

그렇다면 해외에선 어떻게 판단할까. 미국과 영국의 경우에도 연예인을 노동자로 보진 않는다.

미국은 연예인을 대체로 '독립 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로 분류해 소득세와 사회보장세를 스스로 납부해야 한다.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전문 회계법인 '레일 앤 블랙'은 "거의 모든 연예인은 국세청 입장에서 볼 때 자영업자(self-employed)"라고 못 박았다. 또한 "연예인은 일반적인 근로자와 달리 본업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벌 가능성이 크다"라며 "이 때문에 세금 납부 방식도 근로자와 다르다"라고 설명했다.

영국도 연예인을 자영업자로 본다. 물론 방송, 영화, 공연 등에 참여할 때 근로 계약을 맺지만 대체로 고용주로부터 직접적인 감독이나 지시를 받기보다는 자유롭게 작업을 수행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이 연예인을 법과 인권, 복지 혜택의 사각지대에 몰아넣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 5월 막대한 부를 쌓은 극소수의 인기 연예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한 탓에 일반 노동자의 은퇴 연령을 넘겨 70~80세까지 일을 해야만 한다고 전했다.

올해 71세의 작가 겸 배우 알렉세이 세일은 "창작이나 공연의 열정보다는 재정적 압박 때문에 여전히 일하고 있다"라면서 "일이 없을 때는 백화점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며 돈을 벌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가디언>은 연예계는 항상 생활이 불안정하다면서 "대부분의 연예인은 단기 계약으로 일하고, 열심히 경력을 쌓다 보면 노후에 필요한 저축이나 연금 등을 놓치곤 한다"라고 설명했다.

연예인들은 스스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조를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해 총파업으로 할리우드를 뒤흔들었던 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이다.

이들은 지난해 7월 임금 인상과 인공지능 기술 도입에 대한 권리 보장 등을 내세워 월트디즈니와 넷플릭스 등 제작자 측을 대표하는 영화·TV제작자연맹(AMPTP)과 협상을 벌였고, 결렬되자 파업을 선언했다.

이보다 앞서 영화와 텔레비전 작가들을 대표하는 미국작가조합(WGA)도 AMPTP와의 임금 인상 협상이 틀어지자 파업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양대 노조가 63년 만에 처음으로 동반 파업에 돌입한 것. SAG-AFTRA에는 배우 16만 명, WGA에는 1만1천 명의 회원이 소속돼 있다.

할리우드 파업은 두 노조가 ▲최저임금 인상 ▲건강 및 연금 보험 확대 ▲제작사 측의 투명한 수익 공개 ▲제작 환경 개선 등에 합의하면서 5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배우 노아 와일(오른쪽)이 2023년 9월 26일(현지시각)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넷플릭스 스튜디오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미국작가조합(WGA)이 27일 오전 0시 1분 파업을 끝낸다고 밝히면서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의 협상에 귀추가 주목된다.
배우 노아 와일(오른쪽)이 2023년 9월 26일(현지시각)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넷플릭스 스튜디오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미국작가조합(WGA)이 27일 오전 0시 1분 파업을 끝낸다고 밝히면서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의 협상에 귀추가 주목된다.AP=연합뉴스

'인권 사각지대' 놓인 연예인... 법 체계 마련 시급

가수 및 음악가에게는 미국 음악가 조합(AFM)이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약 7만 명의 회원을 두고 있으며 가수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밴드, 영화 및 TV 매체 음악가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AFTRA 총파업에 자극을 받은 AFM도 지난 1월부터 ▲임금 인상 ▲의료보험 및 근로환경 개선 ▲저작권료 등 현안을 놓고 AMPTP과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다.

AFM 회장이자 수석 협상가인 티노 갈리아르디는 CNN 방송에 "음악 산업의 변화로 인해 음악가들의 수입이 줄었다"라며 "음악가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모든 일을 할 준비가 돼 있다"라고 강조했다.

영국도 별도의 음악가 조합(MU)이 있다. 이들은 "음악가의 고용과 전반적인 소득을 극대화하고 근무 조건을 보호 및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며 "모든 회원의 필요에 따라 법적 조언과 지원을 제공한다"라고 설립 목적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MU는 최근 새로 출범한 영국 노동당 정부와 함께 가수, 연주자, 작곡가 등 음악가의 근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입법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캐나다도 캐나다 음악가 조합(CFM)을 두고 음악 산업 종사자들의 권리 보호를 대변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미국 정부가 공연을 위해 미국에 오는 해외 연예인에 대한 비자 수수료를 4배 가까이 대폭 인상하겠다고 발표하자 CFM은 성명을 내고 강력한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들의 상황 또한 한국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캐나다 CBC 방송은 지난해 할리우드 총파업이 벌어졌을 당시 "연예인은 법에 따라 독립 계약자로 규정되기 때문에 집단으로서 누릴 수 있는 법적 및 사회적 보호에 접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라며 "배우, 작가, 현장 직원들이 대규모로 협업하는 영화·TV와 달리 소규모나 개인 작업이 많은 음악가들은 더욱 그렇다"라고 짚은 바 있다.

이른바 'K컬처'로서 연예 산업이 급성장한 한국도 연예인의 특수성을 고려한 법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갈수록 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고도화되면서 그만큼 분쟁이 다양해지는 데다, 사안이 노동 및 인권 이슈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서 2009년 동방신기 일부 멤버와 소속사 간의 법적 분쟁, 고 장자연 파문 등을 계기로 연예계의 '노예계약' 논란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바 있지만 뚜렷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할리우드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탤런트 에이전시 법'(Talent Agency Act)을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하기도 한다. 연예인이나 예술가의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률로, 연예기획사를 설립할 때 노동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연예인과 계약을 맺을 때도 계약서를 제출해 승인을 얻어야 한다. 또한 분쟁이 발생해 기획사나 연예인이 청원을 제기하면 노동당국이 직접 중재에 나서기도 한다.

한국의 연예 산업 역시 '글로벌 스탠다드'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이러한 입법 개혁과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다.
하니 근로자 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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