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이 이제 막 끝난 1919년, 패전국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기근이라 해도 좋을 궁핍함을 겪고 있었다. 전란이 지속된 5년여의 시간 동안 막대한 전비를 감당한 건 물론, 돌보지 못해 황폐해진 토지며 승전한 연합국 측의 경제제재로 금융과 무역까지 봉쇄돼 일반 시민의 삶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끔찍했다.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으로 패전국이 영토할양은 물론, 막대한 배상금까지 부담케 되며 정부가 적자를 면하고자 화폐를 마구 찍어낸 것은 자국 경제에 치명타를 입혔다.

경제가 무너지면 그 사회의 가장 약자가 큰 타격을 입게 마련이다. 아동,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어린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꼭 그와 같았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배를 곯았다. 아사자가 속출하고 영양실조는 놀라울 것 없는 질병처럼 취급됐다. 그러나 이는 패전국의 문제일 뿐, 역시 경제 재건에 여념이 없던 승전국 측은 저들의 원수였던 이들을 굳이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이 시절, 영국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런던 트라팔가 광장 복판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여성이 있다. 여성에게 참정권도 없던 그 시절, 불과 몇 년 전까지 총칼을 맞대고 싸웠던 패전국의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며 관심을 독려하는 전단이었다. 전단지엔 기아 상태에 놓인 아이 사진과 함께 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호소가 담겨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에글렌타인 젭, 아동권리와 관련해 대표적인 세계적 비정부기구(NGO)가 되는 '세이브더칠드런'의 창시자다.

아동권리영화제 포스터
아동권리영화제포스터CRFF

아동권리 일깨워온 CRFF의 10년

적대국 아이를 구하기 위해 돈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당시 현행법에 저촉됐다고 한다. 모금을 독려하던 그녀가 전시 국토방위법 위반으로 체포돼 유죄판결을 받았다던가. 그때 부과된 벌금은 명목상의 5파운드가 고작이었다는데, 그녀를 기소해야 했던 검사는 젭의 숭고한 행위에 공감을 표하며 그 벌금을 대신 내주었단다. 이것이 세이브더칠드런이 받은 첫 기금이라고.

굳이 이 단체의 창설 이야기를 하는 건 그것이 충분히 극적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지난 한 세기 동안 세이브더칠드런은 고통받는 아이가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왔다. 전쟁은 아이에게도, 아니, 아이에게 더욱 심각한 위협이 되곤 한다. 한국전쟁 가운데서도 그들의 도움이 있었고, 오늘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 또한 외면하지 않고 관심을 촉구하는 것이다.

아동권리, 아이의 권익을 향상케 하는 일이 계도적이며 계몽적 구호로 가능한 것이었다면 진즉에 이뤄졌을 테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그리 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어서 여전히 아동의 권리에 무감각한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전쟁과 질병에 맞닥뜨린 나라 바깥 아이들은 물론이고, 아동학대로 고통받는 나라 안 아이들까지, 그에 대한 관심을 적절한 수단으로 환기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이 지난 2015년부터 아동권리영화제(CRFF: Child Rights Film Festival with Save the Children)를 이어온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이세계소년 스틸컷
이세계소년스틸컷CRFF

납작한 문제인식, 오리지널 영화가 있기까지

영화를 통하여 아동권리를 알리는 일에 매진해온 지난날이다. 그러나 지난 10년이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지는 못했을 터다. 영화제가 해를 거듭하며 단편영화 경쟁 섹션 출품작이 올해 234편에 이를 만큼 규모가 커졌지만, 작품의 질이며 담고 있는 주제의식, 완성도 면에선 실망스런 요소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영화가 다루는 아동권리의 면모가 아동학대며 학교폭력 등 대체로 몇 가지로 추려진단 점은 아동권리가 논의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돌아볼 때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제를 담당해온 주순민 세이브더칠드런 선임 매니저는 이를 '납작하다'고 표현한다.

아동권리며 인식에 대한 납작한 문제의식을 극복하고 영화제를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선택으로, 세이브더칠드런과 아동권리영화제는 오리지널 필름을 제작해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자주 다뤄지지 않은 이야기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찍어내는 작업이 충분한 효과를 일으키길 기대했다. 그 결과가 김성호 감독의 <이세계소년>이 되겠다.

2014년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으로 화제를 모았던 김성호다. 바바라 오코너의 원작 소설을 한국화해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가족영화로 완성했다. 이를 세이브더칠드런은 남다른 눈길로 바라본 모양인데, 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그만의 독자적인 시각을 내보인단 측면에서 아동영화로 바라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그를 적임자로 선정하고 첫 오리지널 필름을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감독과 영화제 측이 우선 뜻을 모은 건 'NGO스럽게 찍지 말자'는 것, 말하자면 교훈적이거나 공익광고스러운 뻔한 영화를 만들지는 말자고 의견을 모았단 이야기다. 30분 가량의 짧은 러닝타임 가운데 아동권리의 새로운 측면을 부각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그를 감독은 SF라는 형식으로 돌파하려 든다.

이세계소년 스틸컷
이세계소년스틸컷CRFF

아동권리 영화를 SF로 찍어냈다

아동권리와 SF라니, 여러모로 낯설고 어색한 조합이다. 이 조합을 참신하고 새롭다 여기게 하는 것, 그것에 <이세계소년>의 성패가 달렸다 해도 좋겠다.

영화는 남보다 발달이 느린 아이 지우(김진영 분)의 실종으로부터 출발한다. 좌천되다시피 여성청소년과로 와 근무하며 실적을 쌓으면 옮겨준단 소리만 믿고 살고 있는 전미현 형사(금해나 분)가 지우의 실종을 수사하기 위해 학교를 찾는다. 지우의 담일 교사(박세준 분)부터 급우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실종 직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적하는 게 수사의 시작이다.

장애는 아니지만 발달이 뒤처진 아이다. 여러모로 아이들에게 위화감을 주었을 여지도 충분하다. 따돌림은 없었다고 하지만, 가만히 이야기를 듣자 하니 신경이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다. 유튜브로 듣던 노래가 너무 싫다거나, 그리는 그림이 징그러웠다는 증언이 어렵지 않게 나온다. 전 형사가 따돌림을 강하게 의심할 즈음, 학교로 다른 학부모들이 찾아온다.

단순 실종에서 학교폭력 문제로 비화되는 게 아닌지 의심할 즈음, 자전거 타기를 배우던 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세계소년 스틸컷
이세계소년스틸컷CRFF

공감 없는 배려는 무시와 같다고

"지우는 다칠 수 있으니까 저쪽에 앉아서 친구가 하는 걸 구경할까?"

그 친절한 말로부터 비화된 일련의 이야기가 급우 가을(이다혜 분)의 증언과 전 형사의 추적을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야심찬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세계소년>이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 말하긴 어렵겠다. 극적 갈등이 해소되고 지우가 세상 가운데로 돌아오는 결정적 계기는 지극히 작위적인 사건들의 중첩을 통해서다. 결말부 급우들과 전 형사 같은 이들이 각자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다는 이야기가, 또 지우가 그에 감명을 받고 선택을 번복하는 과정이 하나같이 쉽고 성급하게 느껴진다. 심지어는 지우가 다른 행성으로 가려 한다는 설정 또한 설득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세계소년>은 당초 목표했을 아동권리, 특히 보통 아이와 다른 성향이며 역량을 지닌 이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역할을 일부나마 수행해낸다. 남보다 떨어지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심지어 그가 장애인이라 해도 수업에서 배제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그의 역량이 어떻게 되는지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그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각종 현장학습과 체험학습, 또 체육활동 등에서 그를 배제하는 일을 우리는 얼마나 쉽게 결정하는가.

한편으로 영화는 제작과정에 있어서도 통상의 영화제작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아동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고해 눈길을 끌었다. 대기시간이 얼마나 될지를 아동배우 및 그 부모에게 미리 통보하는 건 물론, 오후 10시 이후 야간촬영을 금해 촬영회차가 늘어나는 경우까지 감수했다고 전한다. 기획부터 시나리오 작업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실제 아동의 의견을 반영해 제작에 임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거둔 성취와는 별개로 그 시도만큼은 의미 있다 하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동권리영화제 CRFF 이세계소년 김성호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