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그룹 '퍼퓸'
유니버설뮤직코리아
당시에만 해도 리스너들에게는 아이돌 음악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터라 솔직히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웬걸, 첫 전주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 눈이 번쩍 뜨였다. 미래적인 일렉 사운드에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한 멜로디가 버무려진 퍼퓸의 음악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알고 보니 나카타 야스타카(Nakata Yasutaka)라는 전문 일렉트로니카 프로듀서가 제작하는 그룹이라고 하더라. 그날 이후로 나는 일본 음악에 대한, 또 아이돌 음악에 대한 모든 편견을 버리기로 했다.
그런데도 오랜 시간 동안 한국에서 제이팝은 소수의 마니아만이 즐기는 비주류 문화에 불과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졌던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놀랍게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이팝을 듣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매우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한국 유튜브에서 일본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려고 하면 소위 '지역 록(lock)'에 걸려 재생이 차단되는 일이 매우 일반적이었으며, 일본의 엄격한 저작권 정책 탓에 오로지 일본에서만 영상을 시청할 수 있었다. 멜론 등의 국내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도 제이팝은 잘 수록돼 있지 않아 원하는 곡을 찾기가 어려웠다.
음악 이외의 콘텐츠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팝 가수들은 유튜브를 통해 '자컨(자체 콘텐츠)' 영상을 올리고 해외 팬들을 위해 다국어 자막까지 제공하지만, 제이팝 업계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인기 아이돌 그룹의 경우 멤버들이 매주 토크와 콩트 등을 선보이는 전용 예능인 '칸무리' 방송이 주된 콘텐츠가 되는데, 엄연한 정규 TV 프로그램이므로 유튜브에는 올라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몇 안 되는 해외 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TV 방송을 녹화한 저화질의 영상에 자체적으로 번역한 자막을 입혀 팬카페나 블로그 등지에 업로드해 함께 돌려 보며 눈물겨운 덕질을 해야 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 한 장을 찾아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보이그룹 명가 기획사인 쟈니스의 경우 초상권에 극도로 엄격한 방침을 취해, 쟈니스 소속 연예인의 사진을 허락 없이는 절대로 인터넷에 올릴 수 없도록 했다. 쟈니스 연예인이 표지모델을 맡은 잡지 사진의 얼굴을 전부 지우기까지 할 정도로 제한이 강했기 때문에,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제외하면 그 흔한 기사 사진조차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상황 탓에,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제이팝을 즐긴다는 것은 매우 강한 인내심과 의지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제이팝에 관심을 갖고 '입덕'하려다 그 높은 진입장벽에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한국에서의 제이팝은 주류에서 한참 밀려난 음지 문화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 들어, 갈라파고스와도 같던 일본 시장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AKB48 등의 유명 걸그룹을 제작한 스타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가 2018년 엠넷 < 프로듀스 48 >을 통해 한일 합작 걸그룹 아이즈원을 론칭하고, 쟈니즈 역시 2019년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엄격하던 초상권 방침을 해금하는 등 온라인·글로벌 시대로의 늦은 첫걸음을 내디뎠다.
코로나 이후의 제이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