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넓혀 준 사람을 잊지 못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처음 음악에 빠지게 한 그 가수의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처음 제이팝(J-POP)을 접하게 된 건 아이돌 그룹 퍼퓸(Perfume)을 통해서였다.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지만 2000년대의 한국은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불모지에 가까웠다. 마니아들은 클래지콰이나 허밍어반스테레오, 하우스 룰즈 등 몇 안 되는 한국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의 음악을 고이고이 아껴 들으며 갈증을 달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옆 나라 일본에 아주 기가 막힌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하는 애들이 나왔다더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 애들이 아이돌이라더라. 응? 뭐라고?

비주류였던 제이팝

 일본 그룹 '퍼퓸'
일본 그룹 '퍼퓸'유니버설뮤직코리아

당시에만 해도 리스너들에게는 아이돌 음악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터라 솔직히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웬걸, 첫 전주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 눈이 번쩍 뜨였다. 미래적인 일렉 사운드에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한 멜로디가 버무려진 퍼퓸의 음악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알고 보니 나카타 야스타카(Nakata Yasutaka)라는 전문 일렉트로니카 프로듀서가 제작하는 그룹이라고 하더라. 그날 이후로 나는 일본 음악에 대한, 또 아이돌 음악에 대한 모든 편견을 버리기로 했다.

그런데도 오랜 시간 동안 한국에서 제이팝은 소수의 마니아만이 즐기는 비주류 문화에 불과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졌던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놀랍게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이팝을 듣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매우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한국 유튜브에서 일본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려고 하면 소위 '지역 록(lock)'에 걸려 재생이 차단되는 일이 매우 일반적이었으며, 일본의 엄격한 저작권 정책 탓에 오로지 일본에서만 영상을 시청할 수 있었다. 멜론 등의 국내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도 제이팝은 잘 수록돼 있지 않아 원하는 곡을 찾기가 어려웠다.

음악 이외의 콘텐츠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팝 가수들은 유튜브를 통해 '자컨(자체 콘텐츠)' 영상을 올리고 해외 팬들을 위해 다국어 자막까지 제공하지만, 제이팝 업계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인기 아이돌 그룹의 경우 멤버들이 매주 토크와 콩트 등을 선보이는 전용 예능인 '칸무리' 방송이 주된 콘텐츠가 되는데, 엄연한 정규 TV 프로그램이므로 유튜브에는 올라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몇 안 되는 해외 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TV 방송을 녹화한 저화질의 영상에 자체적으로 번역한 자막을 입혀 팬카페나 블로그 등지에 업로드해 함께 돌려 보며 눈물겨운 덕질을 해야 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 한 장을 찾아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보이그룹 명가 기획사인 쟈니스의 경우 초상권에 극도로 엄격한 방침을 취해, 쟈니스 소속 연예인의 사진을 허락 없이는 절대로 인터넷에 올릴 수 없도록 했다. 쟈니스 연예인이 표지모델을 맡은 잡지 사진의 얼굴을 전부 지우기까지 할 정도로 제한이 강했기 때문에,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제외하면 그 흔한 기사 사진조차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상황 탓에,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제이팝을 즐긴다는 것은 매우 강한 인내심과 의지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제이팝에 관심을 갖고 '입덕'하려다 그 높은 진입장벽에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한국에서의 제이팝은 주류에서 한참 밀려난 음지 문화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 들어, 갈라파고스와도 같던 일본 시장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AKB48 등의 유명 걸그룹을 제작한 스타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가 2018년 엠넷 < 프로듀스 48 >을 통해 한일 합작 걸그룹 아이즈원을 론칭하고, 쟈니즈 역시 2019년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엄격하던 초상권 방침을 해금하는 등 온라인·글로벌 시대로의 늦은 첫걸음을 내디뎠다.

코로나 이후의 제이팝

 J팝 음악축제 '원더리벳 2024'
J팝 음악축제 '원더리벳 2024'원더리벳 프렌즈

이렇게 '쇄국 정책'이 드디어 끝나가던 차에 터진 코로나 팬데믹은 제이팝 업계의 성장에 유리한 상황으로 작용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이 넷플릭스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귀멸의 칼날>, <스파이 패밀리>, <체인소 맨> 등 여러 히트작들이 쏟아져 나오며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덕후'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다수의 한국 대중이 즐기는 메이저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애니메이션에 수록된 주제가 위주로 제이팝의 인지도 역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인기작 <주술회전>은 삽입곡을 부른 록 밴드 킹 누(King Gnu), 히츠지분가쿠(Hitsujibungaku), 싱어송라이터 이브(Eve) 등 수많은 제이팝 스타의 이름을 한국 대중들에게 똑똑히 각인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스파이 패밀리>의 오피셜 히게단디즘(Official髭男dism), <체인소 맨>의 싱어송라이터 요네즈 켄시 등 수많은 가수들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한국 팬덤을 크게 키웠다. <원피스> 극장판 OST로 인기를 얻은 여성 싱어 아도(Ado)는 한국 걸 그룹 르세라핌의 곡 < UNFORGVIEN > 일본어 버전에 피처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틱톡(TikTok) 역시 제이팝의 인기에 불을 붙였다. 제이팝 역사상 가장 성공한 곡 중 하나로 꼽히는 요아소비의 < 아이돌 (アイドル) >은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의 오프닝곡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한국에서는 틱톡 챌린지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아이브 장원영을 비롯해 많은 케이팝 아이돌이 이 노래를 사용한 '최애의 아이 챌린지'에 동참했다.

싱어송라이터 이마세(imase)의 곡 < Night Dancer >는 특이하게도 본국인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히트한 사례로, 틱톡 챌린지 열풍을 타고 제이팝 최초로 멜론 차트 TOP 100에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외에도 싱어송라이터 아이묭, 걸 그룹 '새로운 학교의 리더즈' 등이 틱톡을 통해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에 힘입어 올 연말부터는 그야말로 제이팝 가수들의 '내한 러쉬'가 시작될 예정이다. 12월 한 달 동안에만 제이팝 열풍의 선두주자 요아소비를 비롯해 후지이 카제, 오피셜 히게단디즘 등의 가수들을 한국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들은 1만여 석을 넘는 규모의 단독콘서트를 매진시키며 그 티켓 파워를 증명하고 있다. 지난 11월 초에는 AKB48, 유우리, 사쿠라자카46 등 일본의 인기 가수들이 총출동한 제이팝 페스티벌 '원더리벳'이 열리기도 했다.

'덕후'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제이팝은 어느덧 번화가 길거리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장르가 됐다. 한국의 제이팝 마니아들에게는 여러모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유튜브로 뮤직비디오 하나 보지 못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가수들이 직접 한국에 찾아와 공연까지 해 주는 시대가 왔으니 말이다.

물론 아직 완전히 제이팝의 대중화가 이뤄졌다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상술했듯 현재 제이팝의 한국 인기는 애니메이션과 틱톡이라는 외부 요인에 다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흐름이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날지, 아니면 더 큰 변화의 시작점이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만큼은 우리 곁에 다가온 제이팝의 황금기를 마음 편히 만끽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는 이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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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정빈입니다. 연세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문화비평학을 전공했고, 지난해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여성동아, IDOLE 등 다양한 웹진과 잡지에 대중음악 칼럼을 기고해 왔습니다. (문의: bin548354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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