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래디에이터 2>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정작 꿈을 꿀 사람이 없다
<글래디에이터 2>는 전편의 감동을 살리지도, 리들리 스콧의 장점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전편과 달리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는 나머지 이야기가 메시지에 짓눌렸기 때문. 1편의 감동이 단지 메시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정도로 <글래디에이터 2>에서는 악역인 마크리누스를 빼면 특징이나 동기가 명확한 캐릭터를 보기 어렵고, 막시무스처럼 극을 주도하는 인물도 없다.
주인공 루시우스를 보자. 그에게는 출생의 비밀을 비롯해 주인공으로서 필요한 모든 조건이 주어져 있다. 문제는 그에게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는 것. 일례로 그가 아내의 복수를 다짐하는 계기는 전형적이다. 막시무스가 가족의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극명하다.
그가 로마에서 검투사들을 이끌어 반란을 주도하는 장면에서도 전율이나 감동은 느끼기 어렵다. 그가 검투사들의 지도자가 된 과정, 검투사들이 그에게 동조하는 이유를 안 보여줬기 때문. 전투나 검투장에서 루시우스가 막시무스처럼 존경받을 만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와 검투사들이 유대감을 갖는 명확한 계기도 없다.
즉, 루시우스에게서는 어떤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단지 공화정과 민주주의라는 '로마의 꿈'을 보호하기 위해 설정된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가 대의를 추구하는 명분 역시 단지 태어날 때부터 고귀했던 그의 혈통에서 비롯되는 듯 보인다. 그 결과 루시우스의 모든 선택과 행적에서는 감동을 느낄 수 없다. 그가 두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도, 사적인 복수 대신 대신 대의를 선택해도, 카리스마나 비장미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로마의 꿈'이라는 대의를 지지하든 안 하든 개개인의 동기나 매력을 알 수 있는 캐릭터가 거의 없다. 아카시우스 장군이 대표적이다. 그는 어찌 보면 전편의 막시무스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황제에게 대항했다가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검투사가 되었기 때문. 그와 동시에 차별점도 명확하다. 루시우스의 개인적인 원수이자, 그의 성장을 도와주는 조력자라는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니까.
그런데 <글래디에이터 2>는 이러한 특이점을 살리지 못했다. 아카시우스라는 캐릭터가 파편적으로 제시된 나머지 그의 행적을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 그가 황제에게 환멸을 느끼고, 공화정을 복원하기 위해 반란을 꾀하며, 모든 권력과 지위를 버릴 정도로 아내 루실라에게 충성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결국 핵심 인물 중 하나인데도 아카시우스는 등장할 때마다 영화 전개를 뚝뚝 끊는다는 인상을 남긴다.
마크리누스가 유일한 예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노예였던 그는 힘으로 '로마의 꿈'을 짓밟고 로마의 권력자가 돼 복수하려 한다. 막시무스나 루시우스에게 검투장이 '로마의 꿈'이는 이상향을 실현하는 성소라면, 그에게 검투장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현실을 확인하는 장소인 셈이다. 이처럼 동기와 서사가 확실하다 보니 마크리누스의 음모가 본격화되는 순간부터 영화에는 비로소 활력이 돈다.
고질병마저 재발하다
이처럼 대부분의 캐릭터가 평면적이고, 메시지를 위해 도구적으로 소비돼 버린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글래디에이터 2>는 서로 다른 두 영화를 합친 작품이나 다름없기 때문. 영화는 크게 둘로 나뉜다. 검투사로 전락한 루시우스가 아카시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성공해 나가는 이야기가 전반부다. 한편 아카시우스의 죽음을 목격한 루시우스가 로마의 영웅으로 거듭나기로 결심하면서 마크리누스와 대적하는 내용이 후반부다.
사실 두 이야기는 각각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하다. 그러나 <글래디에이터 2>는 애초에 무엇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 본래 의도대로 결말을 낼 수 없기 때문. 혈통을 제외하면 루시우스는 로마의 정치적 상황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를 로마의 구원자로 만들려면 로마의 장군이었던 막시무스와는 달리 부가적인 접점이 필요했다. 전편보다 다룰 사건도 많아지고, 이야기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캐릭터의 감정선을 세심히 조명할 여유가 없으니 템포는 빨라지고, 로마 공화정의 부활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개연성도 일부 희생돼야만 했다. 리들리 스콧의 고질병이 재발한 셈이다. <킹덤 오브 헤븐>을 비롯해 그의 영화는 극장판과 감독판의 완성도 차이가 크기로 유명하다. 분량상 편집된 장면이 삽입된 감독판의 개연성과 완성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글래더에이터 2>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