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바다 갈매기는> 스틸
㈜트리플픽쳐스
이야기 외형만 놓고 보면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극이다. 감독은 초반부터 비밀을 감추지 않고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용수는 멀쩡하게 어딘가 숨어 있고, 보험 사기 실행을 담당하는 영국은 돕겠다는 의도로 조력하다 졸지에 적극적인 실행범이 되는 신세다.
그는 영화 내내 전전긍긍하며 남들이 자신을 오해해 매도하건 말건 끙끙 앓아가며 분투한다. 판례는 선장인 영국이 몰인정하고 무책임하다며 비난하고, 주변 어민들도 돈독이 올랐다며 영국의 행색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왜 영국은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걸까.
이런 가운데 이웃의 불행을 자기 일처럼 팔 걷고 나서 돕던, 비록 쇠락해 가지만 공동체 의식이 살아 숨 쉬는 것 같던 마을의 어두운 이면이 화면에 그려지기 시작한다. 마을의 몇 안 되는 청년 중 하나가 조업 중 사고로 죽었다는 건 그의 어머니 외엔 다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마지못해 가족의 의지대로 껍데기 수색만 대충 하릴없이 이어질 뿐이다.
모두가 그런 상황에 동의한다. 한 달 훌쩍 넘어가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웃들은 용수 목숨의 대가로 받게 될 보험금 액수를 계산하기 시작한다. 달리 악의는 없다. 그저 호기심에 함께 그물을 걷고 생선을 손질하다 우연히 튀어나올 법한 일에 불과하다. 수색을 돕느라 하지 못한 조업에 대한 보상금은 언제 얼마나 나올지도 불쑥 화제로 튀어나온다. 다들 형편은 고만고만하고, 자신에게 금전적 이익이 돌아올지 모른다면 누구라도 촉각을 세우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용수의 사망 보험금은 상당한 액수다. 속된 말로 유가족이 신세 고칠 정도다. 수령자가 누구인지 호사가들은 입방정을 열심히 떤다. 공교롭게도 아내인 영란이 수혜자다.
여기에서 판례의 사망 신고 거부에 이어 영국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두 번째 암초가 등장한다. 베트남 이주여성인 영란은 남편이 죽고 아이도 없기에 영주권 신청 자격을 충족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얼른 사망 신고 처리하고 영란이 고향으로 보험금을 수령해 돌아가면 외국에서 새 삶을 출발할 꿈을 꾸던 용수로선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영국은 영란을 데리고 간 출입국 관리소에서 역정을 터뜨리며 매정한 처사에 항의하지만, 다른 대책이 나올 게 없다. 이러다간 영란은 돈 한 푼 못 받고 강제추방될 꼴이다. 판례는 그저 아들이 돌아올 거란 집착에 빠져 있고, 영란은 쫓겨날 위기다.
영국의 타는 속을 알 리 없는 이웃 주민들은 영란이 남편 목숨으로 부자가 됐다며 시기 질투를 시작한다. 한 번 발화된 집단적 악의는 어느새 차별과 혐오로 확장된다. '우리'와 다른 이방인은 이 시골 마을에서 낯설고 속을 알 수 없는 '타자'에 불과한 것이다.
제작진은 승부수를 던진다. 절대 악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가진 편견이 어떻게 집단적인 배제로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지 사회학 교재 예시처럼 구현하려는 것이다. 본 작품의 백미는 뭐니해도 그 형상화 과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지방 소멸의 현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