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본인 출연, 제리>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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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제 결백을 밝힐 수만 있다면 협조하겠습니다."
제리(제리 슈 분)는 미국 올랜도에 살고 있는 대만계 미국인 남성이다. 40년 가까이 엔지니어로 살아온 그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바다를 건넌 이민 세대에 해당한다. '풍요로운 죽음보다 가난한 삶이 낫다'는 중국 격언을 실천하며 자신을 위해서라곤 한 푼도 쓸 줄 모르고 아등바등 살아온 그는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 공안부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는다. 자신이 화폐 위조와 돈세탁 혐의가 걸린 국제적인 사기 사건의 용의자로 수배됐다는 것이다.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면 모든 자산을 동결하고 중국으로 송환하겠다는 말에 제리는 누명을 벗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잘 짜인 이야기와 수화기 너머 조력자의 완벽한 호흡에 어떤 의심도 하지 못하고 겁에 질린 채로. 이 모든 상황이 보이스피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다.
영화 <본인 출연, 제리>는 제목 그대로 실제 범죄 사건에 연루된 바 있는 인물 제리 슈가 직접 스크립트를 완성하고 출연까지 하며 완성한 작품이다. 전문 배우를 캐스팅해 온전한 극영화의 형태를 취한 것이 아닌, 자신과 세 아들, 그리고 전처가 직접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며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재연과 실제 사건이 결합된 형태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영화의 엔딩크레딧에서는 실제 사건에서 이용된 증거와 자료가 극 중에서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연출된 상황에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완성하는 모큐멘터리(Mockumentary) 장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독특한 형식의 접근법이다.
실제의 사건을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형식의 구조화된 기법과 프레임 속에서 완성하려 한 가장 큰 이유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극영화의 모호성이 증가할 때, 오히려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당사자인 제리가 극을 이끌어나가는 식의 구조 또한 관객이 그의 시선과 관점에 오로지 의지하게끔 만들어 그 경험을 극대화하도록 유도한다. 영화의 시작에서 '실화'와 관련된 여러 문구가 반복돼 제시되는 과정 끝에 '실화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의 연출에 속한다.
02.
오프닝 장면에서 제리의 실제 가족 모습이 담긴 홈 비디오 화면이 제시되는 것으로부터 이 작품을 연출한 로렌스 첸 감독이 얼마나 영리한 방식으로 이 극을 구성하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그는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사건을 어느 피해자의 실수나 무지로 몰고 가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리라는 인물이 가진 배경이 첫 시작에서 그려지는 이유고, 이후의 장면들을 통해 그가 은퇴한 인물이며, 이혼과 분가를 통해 홀로 지내는 상태임을 분명히 밝히는 까닭이다. 일종의 고립감이라고 해야 할까? 특정한 감정 위에서 피할 수 없는 보이스 피싱 범죄에 휘말리게 되는 그의 모습은 반대 지점에 놓인 범죄자들의 치밀하고 정교한 사기 행각을 더 두드러져 보이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이민 온 세대가 가진 가족과 고국에 대한 내면적인 측면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제리라는 인물이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협박은 '모든 자산의 동결과 중국으로의 송환 인도'에 있으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처한 위협과 어려움을 다른 가족에게 이양하거나 분산하고자 하지 않는다. 중국 공안부 소속이라는 장 순경과 오우 형사가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개인의 책임감 또한 그가 꾸며진 사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