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합니다. 남녀관계의 사랑만을 대우하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 대중문화를 향해 퀴어의 관점으로 질문을 던져 봅니다.[편집자말]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얼마 전, 한 영화제의 게스트들과 서울 투어를 했다. 서울을 찾은 감독과 배우, 평론가 등 해외 영화계 관계자들이었다. 상영이 없는 평일 오후엔 경복궁 등 고궁을 구경하고, 주말 저녁엔 이태원의 클럽을 소개해 줄 예정이었다. '주말에 어디 갈 거야?' 젊은 남자 감독이 물었다. 올해 새로 생긴 게이 클럽 중에 어디를 갈지 고민하던 와중에 이미 정보에 빠삭한 그가 "P? G?"라며 먼저 클럽 이름을 물었다.

투어의 목적은 한국 퀴어 문화에 관심 많은 그들에게 이태원 게이클럽을 소개하는 것. 자정 전부터 이태원 해밀톤호텔 뒤쪽의 클럽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이곳은 주로 이성애자들이 노는 클럽이고, 게이클럽은 반대쪽에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한껏 꾸민 성인 남녀들이 술을 마시며 춤을 추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이태원 소방서 쪽으로 향했다. 게이클럽이 모여있는 이태원 소방서 사거리와 뒤쪽 골목은 비교적 한산했다. 보통 자정은 넘어야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게이클럽이 하나둘 생겨난 이태원의 한 언덕길을 '호모힐' 또는 '게이힐'이라 부른다. 게스트들과 그 언덕을 함께 올랐다. 이제 막 영업을 준비하고 있는 클럽과 바의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드랙 공연을 하는 곳, 외국인들이 주로 찾는 곳, 20년 넘게 같은 이름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그중 우리가 간 클럽은 게이, 여성, 외국인 모두를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겉보기엔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실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래도 게이를 대상으로 영업하는 곳이 많다 보니, 모두 다 다 함께 즐기고 환대하는 공간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바 쪽의 모니터에는 1세대 걸 그룹 핑클부터 에스파까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케이팝 뮤직비디오가 쉴 틈 없이 흘러나왔다.

사람들과 나는 함께 춤을 췄다. 익숙한 음악을 듣자 몸이 자연스레 반응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대만 출신 감독은 내게 스마트폰으로 한 영상을 보여줬다. 그는 블랙핑크의 멤버 제니가 지난 10월 샤넬 컬렉션에서 입은 하늘색 니트에 핫팬츠를 코스프레한 채 최신곡 '만트라'를 챌린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타이완 제니'라고 장난스럽게 소개했다. 'This that pretty girl mantra(이건 예쁜 여자를 위한 주문)'이란 가사처럼 다른 인종, 언어에도 서로 통하는 '끼'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케이팝과 게이클럽의 전성기

 이태원의 게이클럽이 등장하는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한 장면
이태원의 게이클럽이 등장하는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한 장면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오늘날 이태원의 게이클럽 신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게이 클럽은 여러 변화를 맞이했다. 코로나19유행 전까지 대형 클럽이 중심이었다면, 현재는 중소형 규모의 클럽이 많아졌다. 소방서 사거리를 중심으로 올해 새로 생긴 클럽만 해도 최소 3개 이상이다. 과거에는 대로변에서 조금 벗어난 호모힐에 근처에 클럽들이 주로 있었다면, 지금은 대로변으로 진출했다.

2000년대 후반 가장 잘나가던 클럽 P가 있을 때만 해도, 한동안 케이팝을 트는 시간은 오전 2시로 정해져 있었다. 케이팝, 특히 걸 그룹의 음악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듣고 즐기는 건 암묵적으로 금기시됐다. 내가 느끼기엔 속으로는 좋아하고 있어도 겉으로 티를 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타임마다 무대에 올라가서 커버 댄스를 춘 사람들은 주목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 클럽을 오기도 했다.

그 뒤로 케이팝의 글로벌 위상이 올라가면서 케이팝을 메인 음악으로 하는 클럽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그곳을 찾고 즐기고 있다. 내국인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태국 등 퀴어 관광객들에게 역시 케이팝이 나오는 게이 클럽은 필수 방문 코스로 자리 잡았다.

르세라핌의 'CRAZY'와 '보깅'

 보깅(Voguing) 댄스를 선보이며 등장한 르세라핌
보깅(Voguing) 댄스를 선보이며 등장한 르세라핌 쏘스뮤직

아시아의 대표적인 관광도시 태국 방콕엔 한국보다 케이팝을 더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클럽이 있다. 실롬에 있는 게이클럽 D의 케이팝 스테이지에선 에스파, 뉴진스, 르세라핌 등 인기 아이돌의 신곡이 공개되면, 그날 저녁 클럽의 사람들이 포인트 안무를 따라 춘다. 외국에서 케이팝은 서브컬처의 하나로 소비되고, 퀴어들이 그 한 축을 담당해 왔다.

케이팝의 매력은 가수들의 잘 가꿔진 외모와 음악, 세련된 뮤직비디오와 패션이다. 그리고 케이팝 아이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군무다. 멤버들이 단체로 춤을 춘다는 점은 사람들이 따라하고 싶게 만들면서 동시에 팀워크를 요구한다.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퍼포먼스는 걸 그룹 르세라핌의 'CRAZY'였다. 이 곡은 이태원과 실롬 등 게이클럽에서도 인기였는데, 춤과 뮤직비디오에서 '보깅(Voguing)'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미국의 유명 보깅댄스 팀 아이코닉 하우스 오브 쥬시 꾸뛰르(Iconic House of Juicy Couture) 소속 댄서들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보깅은 잡지 <보그>에 등장하는 모델처럼 부자연스럽지만 우아하게 팔을 쓰거나, 쭈그려 앉아서 걷거나, 플로어에 완전히 눕는 동작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깅이라는 장르를 단지 춤으로 이해하기엔 조금 더 복잡하다. 특히 댄서 여럿이 보깅을 추는 모습을 '댄스 경연'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댄스 경연이 아니다. 보깅 댄서들은 춤을 출 때, 런웨이를 걸으면서 '서빙'한다고 말한다. 이 문화가 탄생한 배경이 소수자들의 당당한 태도, 저항 정신, 패션 등을 보여주는 것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르세라핌 역시 데뷔 이후 타이틀곡 제목처럼 'FEARLESS(두려움 없는)', 'ANTIFRAGILE(깨지지 않는)', 'CRAZY(미친)' 등 대담한 노랫말과 새로운 콘셉트로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번 4집 미니앨범도 보깅 외에도 힙합, 락 등 기존 음악 장르와 컨셉을 재해석하는 새로운 도전이 돋보였다.

사실 르세라핌의 올해를 돌이켜보면 치열한 음악 시장의 경쟁 속에서 라이브 실력, 소속사 하이브 관련 논란으로 과도한 비판에 시달린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자신들을 향한 걱정 어린 시선을 정면으로 돌파해 내며 'Act like an angel and dress like crazy(천사처럼 행동하고, 미친 듯한 옷을 입어라)'라는 가사처럼 '당당하게 즐기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완벽한 모습 뒤에는 어느 아이돌이 그렇듯 수많은 노력이 뒤따랐을 것이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그대로 춤과 음악을 즐기는 모습은 르세라핌다웠다. 그리고 이는 소수자들의 저항과 당당함을 표현한 보깅과 잘 어울렸다. 시대와 배경은 조금씩 달라도 자기 개성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보깅의 매력이자 정신이기 더더욱 그랬다.
르세라핌 케이팝 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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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스 에디터. 도시생활자를 위한 팟캐스트 <개인사정>을 진행하며, 에세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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