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흑역사를 다룬 영화 <어프렌티스>. 미국 대선을 불과 한 달 앞에 두고 트럼프 후보의 저격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논란의 작품이다. 지난 5월 칸 영화제 경쟁 부문 후보작으로 초청받을 만큼 완성도가 높지만, 배급 문제로 곤란을 겪다가 지난 11일(현지시각)이 되어서야 미국에서 먼저 개봉했다.

지난 18일(현지시각) 미국 현지에서 본 이 영화를 보니 트럼프 후보를 끌어 내릴 '결정적이고 강력한 한 방'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이 영화가 정치적인 목적만을 가지고 누군가를 저격하기 위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폭로성 소재도 아니다'라는 뉴요커지의 평론이 적절한 듯싶다. 영화가 끝나자 내 앞의 한 관객이 아내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So What?')' 짧은 그의 읊조림이 '트럼프의 기행에 익숙한 유권자'의 반응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는 좀 다른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다. 정치인을 향한 도덕적 기대치가 남아 있는 한국의 정서상 '뭐야, 저런 인물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세계를 쥐락펴락하겠다고? 미국도 참 어지간히 인물 없네'라고 말이다.

차분한 다큐멘터리

 롱아일랜드는 부동산 업자들에 의해 갑자기 개발된 주택지구이다. 개발 전에도 항공 우편 산업이 발달 될 만큼 너르고 편편한 땅이었다. 동네의 작은 언덕위에서 50킬로미터 밖의 맨해튼 도심이 보일 정도로 편편하다.
롱아일랜드는 부동산 업자들에 의해 갑자기 개발된 주택지구이다. 개발 전에도 항공 우편 산업이 발달 될 만큼 너르고 편편한 땅이었다. 동네의 작은 언덕위에서 50킬로미터 밖의 맨해튼 도심이 보일 정도로 편편하다.장소영

영화관은 한산했다. 한창 관객으로 붐빌 주말 저녁 시간인데도 백인 중년 부부 두 커플과 나, 다섯 사람이 전부였다. <어프렌티스>의 흥행 실적이 저조하다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영화는 트럼프의 부풀려진 성공 신화가 시작되기 직전의 약 10년간을 다룬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형 프레드는 알콜중독자가 되고, 차남인 트럼프가 가업을 승계해 부동산업에 뛰어든다. 배경은 롱아일랜드가 아닌 맨해튼이다.

내가 사는 롱아일랜드는 뉴욕 맨해튼 동쪽의 긴 섬으로, 원래 항공 우편 산업, 철도, 물류 창고, 농장 등 뉴욕시를 위해 물자를 조달하던 큰 평원 지역이었다. 유럽 이민자들이 배를 타고 한 두 달 걸려 대서양을 건너오면, 처음 보는 희망의 나라 미국의 등대가 바로 롱아일랜드 동쪽 끝 몬탁 등대다.

트럼프의 할아버지도 이 등대를 따라 뉴욕으로 온 독일계 이민자였다. 세계대전 중에는 스웨덴계라고 속여 말하기도 했다. 살아남는 데 유리한 지점을 잘 아는, 생존력이 강했던 집안인 셈이다. 그러다 1,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한국전 등을 지나며 롱아일랜드에 부동산 붐이 크게 일었다. 이틀 만에 작은 집 한 채를 세우는 조립 기술이 개발되어 대규모 주택단지가 차례로 들어섰고, 맨해튼 북쪽에 대형 토목공사가 시행되자 롱아일랜드로 주민 대이동이 있었다. 이 틈을 타고 트럼프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부동산업에 성공해 부를 축적했다.

트럼프는 롱아일랜드라는 심심한 교외 지역보다 맨해튼 중심부에서 부동산업을 하길 원했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미리 본 예고편은 강한 비트의 배경 음악이 깔려있었다. 그래서 전개가 빠르고 영화의 분위기도 힘이 넘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시종일관 차분하게 진행되어 때때로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감독은 작품을 극적으로 몰아가는 요소나 장치를 배제하고 대신 조밀하게 엮인 장면, 장면을 통해 트럼프라는 인물, 로이 콘이라는 희대의 인물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분출보다 농축된 힘을 사용한 셈이다. 연출도 훌륭했지만, 악마의 변호사 로이 콘(Roy Cohn) 역을 맡은 배우 제레미 스트롱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트럼프와 로이 콘

 영화 <어프렌티스> 스틸컷
영화 <어프렌티스> 스틸컷브라이어클리프 엔터테인먼트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인생은 절묘하게 교차한다. 트럼프가 난관을 겪는 신출내기 사업가에서 출발해 절정으로 올라서는 동안 로이 콘 변호사는 권력의 절정에서 바닥으로 서서히 낙하한다. 성공과 권력에 매몰된 두 어른, 아버지 트럼프와 로이 콘 변호사의 절정기에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도 더 거대한 괴물이 되어갈 젊은 트럼프를 끌어 올려 준 것이다.

미국에서 로이 콘은 악명 높은 인물이다. 미국 민주주의에 해악을 끼치고 정치의 정도에서 탈선하게 된 것이 트럼프 이전에 로이 콘이 있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유대인이었으나 유대인을 혐오했고, 동성애자였으나 끝까지 그 사실을 부인했으며 오히려 동성애자인 정적을 극렬히 공격했다. 메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시절 워싱턴 정가와 문화계에서 수많은 이들을 빨갱이 혹은 사회주의자로 몰아 축출한 사냥꾼이고, 이후에는 뉴욕으로 옮겨와 30여 년 동안 고객을 가리지 않고 변호해 승소를 끌어냈다. 마피아도 그의 고객이었다.

거짓말, 불법 도청, 허위 정보와 가짜 뉴스 생산, 협박, 로비... 로이 콘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 거리낌 없이 저질렀고 이를 트럼프에게 그대로 전수했다. 젊은 트럼프를 '대니 보이, 키즈'라고 부르며 자신의 사생활도 감추지 않고 내보였다. 트럼프는 로이 콘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빨아들인다. 광란의 향락 행위만 빼고 말이다. 형의 알코올 중독이 영향을 미쳐서인지, 트럼프는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대신 음식을 탐하고 성적인 일탈로 은밀한 사생활을 즐겼다.

로이 콘은 특히 언론을 잘 다루었다. 명예롭든 아니든 언론에 자주 노출되어 스타가
되면 될수록 대중과 미디어에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트럼프도 금세 터득했다.

로이 콘에게 트럼프는 어떤 의미였을까. 자신의 핸들을 벗어나 위험인물이 되어갔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트럼프를 칭찬하고 언론 앞에서 그를 치켜세워준다.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거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실패라고 낙인찍지 못하는 분신 같은 존재였기 때문일까.

영화 말미에 에이즈에 걸린 로이 콘이 닿았던 자리가 철저히 소독된다. 트럼프 자신에게서 로이 콘을 지워버리듯 말이다. 트럼프에게는 로이 콘마저도 공격과 버림의 대상, 갈취의 대상이었다. 오직 공격, 패배는 부정, 사과는 절대 하지 말 것, 사과 대신 협의를 이끌어내고 무조건 승리를 선포하고 자축할 것. 로이 콘 키즈, 트럼프는 스승에게 그 배움을 되돌려 줬다.

트럼프의 첫 번째 아내 이바나는 영화 속에서 어쩌면 상징적인 장치인지도 모르겠다. 트럼프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막연한 호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으면서도 쉽게 저버리지 못하고 동조하는 트럼프 주변인 같달까.

"트럼프가 당신에게 준 건 티파니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싸구려 커프스 버튼이에요. 그는 이제 그런 거짓말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되었어요." - 영화 <어프랜티스> 중에서

영화 속 이바나의 말은 로이 콘이 아니라 관객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제 트럼프가 완전히 다른 인격의 사람이 됐다는 뜻이다. 이 장면에서부터 5분여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자극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운동을 거부하고 지방 제거술을 받는 장면, 대머리 치료를 위해 두피 일부를 절개하고 봉합하는 수술 장면, 자서전 작업을 위해 대필 작가와 대담하는 장면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충격적이다. 아바시 감독이 얼마나 공들여 앞선 두 시간을 쌓아 올렸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치 노출증 환자처럼, '대중에게 계속 보이고 싶은 인물'의 욕망을 본 섬뜩함과 트럼프라는 인물이 나아가려고 하는 지점, 나아가면서 벌일 잔혹사를 미리 읽는 것 같은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로이 콘은 트럼프에게 '내가 너를 만들었어, 잊지 마'라고 한다. 그런 로이 콘과 트럼프는 누가 만들어 냈을까. 대중의 취향과 요구가 늘 옳지는 않다는 경고는 아닐까.

가장 큰 고객

 대선 후보를 다룬 작품인데도 영화관이 한적했다. 그만큼 트럼프에 대해서는 더 알것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인물에 대한 영화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한 것 같다.
대선 후보를 다룬 작품인데도 영화관이 한적했다. 그만큼 트럼프에 대해서는 더 알것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인물에 대한 영화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한 것 같다.장소영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로이 콘의 집에서 향락 파티가 시작되는 장면이었다. 트럼프조차도 구역질을 느낄 정도의 난잡한 파티지만 시작에 앞서 로이 콘이 연설 할 때만 해도 트럼프는 그들의 일원이었다. 로이 콘은 연설 중에 자신이 얼마나 미국을 사랑하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다 함께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를 외친다. 그들이 외치는 축복과 유권자가 바라는 축복은 같은 결일까.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여성 그룹 바카라(Baccara)의 'Yes, Sir. I can Boogie'가 흘러나왔다. 바카라는 독일어로 장미라는 뜻이지만 순간 카지노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밤새 부기우기 댄스를 출 수 있다는 유혹적인 가사에 그룹 이름까지. 마지막 엔딩 곡까지 꼼꼼하게 골랐다 싶다.

영화에는 '미국은 가장 큰 고객(I mean America is the biggest client)'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는 어느 한 정당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걸어온 길을 보면 앞으로 걸어갈 길도 보인다고 했던가. 미국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이 과거 걸어온 길에서 과연 성장했는지, 정치 인생을 함께하는 주변 인물은 어떤지 양당 후보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고 싶어졌다.

덧.
영화의 상영 시기가 아쉽다. 대선 기간이 아니었다면 트럼프도 영화도 다른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서로 상처와 손해만 남을 듯싶다.
어프렌티스 트럼프흑역사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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