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방송은 연출이다. 평범하게 일상을 누리는 듯한 출연진 앞에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조명, 카메라, 대본을 들고 '컷'을 따낸다는 걸 알아차릴 때면 예능에서 진심을 느끼는 게 무안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연출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이 지닌 탁월함이다.

이때의 탁월함은 아름다운 미모, 입이 벌어지는 재력, 화려한 재능 같은 것이 아니다. 변주 없이 일상을 기꺼이 연주하는 '성실함'인데, 이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이 반짝인다. 그리고 최근 각기 다른 음계의 성실함으로 리얼리티 예능을 완주한 이들을 발견했다. tvN의 예능프로그램 <언니네 산지직송>의 출연자들이다.

구슬땀으로 꿰어 만든 '노동' 예능

 <언니네 산지직송> 스틸컷
<언니네 산지직송> 스틸컷tvN

<언니네 산지직송>의 본질은 노동이다. 직접 산지에 가서 노동하고 이를 통해 얻어낸 수확물로 밥을 짓는 예능이다. 출연진이 일하는 풍경은 여러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재현됐지만, 마치 직업 체험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적인' 그림이 많았다. 일하면서 피땀 흘려본 사람이라면 안다. 노동은 아름답기만 한 일은 아니란 것을.

그러나 <언니네 산지직송> 속 출연진들은 시청자가 놀랄 만큼 고된 노동을 열심히 한다. 멸치잡이에 뛰어들어 비처럼 쏟아지는 멸치를 맞으며 줍고, 끝도 없는 옥수수밭에서 무한 낫질에 빠지고, 폭우 속에서 갯장어를 잡는다. 그들의 노동이 마냥 고통스럽기만 했다면 진부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성실하게 일한다. 염정아와 덱스는 일하는 곳마다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활약하고 안은진과 박준면은 서툴더라도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며 제 몫을 해냈다. 프로처럼 일하는 멤버들과 낯선 손끝을 분주히 움직이는 멤버들 사이에서 프로그램은 영글어가는 구슬땀을 수확한다.

멤버들의 성실함은 노동 현장에서만 드러나지 않았다. 아침 9시 기상도 늦잠이 되는 <언니네 산지직송>의 세계관에서 모두 쉴 새 없이 움직인다.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며 틈나는 대로 청소하고 요리하는 염정아, 화력의 정석을 보여주는 덱스, 모두가 놓치는 노동 현장의 빈틈을 채우는 안은진까지. 그나마 '베짱이'라 불리는 박준면조차 프로그램 내에서 종종 상황극을 벌이는 것을 빼면 출연진이 가만히 앉아 노는 순간이 없다.

이 '성실함'에 시청자도 반응했다. 1화에서 3.4%로 시작한 시청률은 한 회 거듭할수록 서서히 올라 6화에서 최고 시청률 5.5%를 기록, 마지막 13화(시청률 4.5%)까지 순항했다. 강렬하고 과시적인 소재만 살아남는 예능계에서 '노동'이란 소재로 끌어낼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언니네 산지직송>이었다.

'성실한 실수'는 괜찮다는 말

 <언니네 산지직송> 화면갈무리
<언니네 산지직송> 화면갈무리tvN

물론 프로그램이 정의하는 '성실함'이 완벽주의를 뜻하는 건 아니다. 실수하고, 버둥거려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언니네 산지직송>의 또 다른 본질이다. 지난 10화에는 안은진이 수프를 '곰탕'처럼 끓이는 모습이 담겼다. 조리법을 달달 외우던 그가 '800ml(물 네 컵)'이란 설명을 '800ml를 네 번 넣어라'로 헷갈리면서 벌어진 참사였다.

그의 실수를 받아들이는 다른 출연진들의 방식에서 프로그램 결이 만들어졌다. 진작부터 은진의 실수를 알았지만,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지켜본 것이다. 그들은 허둥지둥 헤매는 은진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며 '곰탕' 같다고 놀리다 가도, 펄펄 끓는 냄비에 옮겨 담아 수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예능계에서 소위 말하는 '빌런' 캐릭터가 탄생하는 건 주로 팀플레이 상황이다. 다 같이 일한다는 것은 서로 힘을 합친다는 의미지만, 동시에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의도와 무관하게 다른 팀원에게 손해를 끼치면 그에겐 쉽사리 '빌런' 딱지가 붙는다. 누구나 실수한다는 말, 이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팀플레이만 하면 한 명쯤 '빌런'이 되는 예능에서 은진의 실수를 다른 출연진들이 웃으면서 지켜보던 장면은 시청자를 안심하게 했다. 곰탕을 수프처럼 끓이든, 혹은 더 큰 사고를 쳤든지 간에 다른 이의 실수를 그저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성실히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실수의 자력(自力) 같기도 하다.

13화를 끝으로 프로그램은 막을 내렸다. 가족사진을 찍으며 마무리한 출연진들은 서로의 식구가 됐다. 무엇이든 날카롭게 되받아치는 세상에서 시청자로서 무해함을 담은 프로그램을 보면 반갑다. 해롭지 않다는 건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서로의 사소한 실수를 웃어넘길 때 가능하다는 걸 <언니네 산지직송>이 보여줬다.

이들의 마지막 인사가 끝이 아니길, 또 다른 시즌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성실했기에 더 뜨거웠던 출연진에게 인사를 보낸다.

 <언니네 산지직송> 메인 포스터
<언니네 산지직송> 메인 포스터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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