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나는 할아버지가 가장 예뻐하던 손녀였다>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내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영원한 이별을 경험해야만 하고, 그로부터 가장 순도 높은 슬픔의 감정을 배우게 된다. 슬픔은 빠르게 지워지지 않는다. 행복이 휘발성이 높은 성질의 감정이라면, 슬픔은 점도가 높은 쪽에 속한다. 오래전부터 사십구재(四十九齋)나 삼년상(三年喪)과 같은 장례 풍습을 이어왔던 까닭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고인을 기리고 기억하는 목적과 더불어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상실의 감각으로부터 잘 회복하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
영화 <나는 할아버지가 가장 예뻐하던 손녀였다>의 첫 장면은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그리는 손녀 연주(김세원 분)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그것도 잠시, 타이틀이 영화의 시작을 알리자마자 장례의 모습이 이어진다. 조금 전, 연주가 사랑스럽게 바라봤던 존재와 이별하는 장면이다. 슬픔에 잠긴 가족들 모습 사이로 그의 모습 역시 함께 등장하지만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 것 조금 헷갈리기라도 하는 듯 복잡한 표정이다. 마지막 한마디를 전하라는 아빠 준석(임호준 분)의 말에도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 영화는 그런 연주의 모습을 따라 소중한 존재를 잃은 사람과 가족의 모습을 조용히 뒤따른다.
02.
"자연 순환된다는 게 사라진다는 거야? 이제 아예 없는 거냐고."
이 작품에는 두 가지 특징적인 연출과 한가지 보편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설정이 함께 활용되고 있다. 먼저 특징 한 가지는 대상이 되는 인물의 상실을 이야기의 시작점에서 바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1분가량의 첫 신을 통해 할아버지와 손녀가 지금까지 어떤 관계를 형성해 왔는지 충분히 엿볼 수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가족이 장례를 치르는 장면은 예상 밖의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는 분명 단편 영화라는 한계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지만, 영화의 내러티브 전체를 놓고 보면 할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소재 및 속성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특별한 에피소드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영화의 마지막에서 수첩을 통해 온점이 찍히기는 한다) 부정할 수 없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신뢰다.
두 번째 특징은 할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이후의 현실 장면과 임종 직전의 기억들이 서로 교차하며 엇갈리는 형식으로 혼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병실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자신의 팔을 강하게 붙들던 할아버지의 손을 마주 잡지 못하고 억지로 떼어내려고 했던 연주의, 짙은 그림자처럼 오래 이어지는 죄책감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누군가의 상실 이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겠다는 백민주 감독의 의지가 엿보인다. 슬픔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만 같은 할아버지의 사망진단서처럼 스스로 깨고 싶지 않은 내면을 찢으면서까지 차고 들어오는 현실의 일들이 이와 같은 형식으로 그려지고 있다(실제로는 현실을 아직 해소되지 않은 감정과 기억이 파고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 영화 <나는 할아버지가 가장 예뻐하던 손녀였다>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하나의 보편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부분은 할아버지의 임종 이후 밀어닥치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이 영화가 피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 <장손>(2024)의 오정민 감독 역시 가족의 기둥과도 같던 할머니의 장례 이후 가족의 갈등이 시작되는 이야기를 가감 없이 담아낸 바 있었다. 그것이 영화의 전부는 결코 아니었지만, 상실의 감정을 채 매만지기도 전에 강요되는 실질적인 문제는 작품을 조금 더 현실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다 놓았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이 다르기에, 이 작품에서는 고등학생 연주의 무게에 맞춰 조정이 된 것일 뿐이다.
"아니 나 지금도 괜찮아. 오히려 내가 힘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학교의 출석 일수를 인정받기 위해 필요했던 할아버지의 사망진단서 외에도 가족에 의해 강요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과 내밀한 기억 역시 그가 마주해야 하는 문제에 가깝게 표현되고 있다. 아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연주에게는 지나온 시간의 사랑과 기억보다 지금 자신을 붙들고 있는 슬픔과 죄책감을 해소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특히 할아버지와 깊은 유대 관계를 맺어왔던 자신이라면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던 자기 모습과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로 인한 2차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할아버지를 마지막까지 묶어두어야 했던 일은 상실의 자리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앉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생일에 가족들을 향해 모진 말을 내뱉는 연주의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준비가 채 되지 못한 존재의 요동치는 슬픔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했던 시간을 기억하는 일조차 미안하고 버거운 날들이 상실의 시간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이제 존재할 수 없는 공동(空洞)의 현실을 버텨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 영화 <나는 할아버지가 가장 예뻐하던 손녀였다>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4.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재촉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의 끝자락을 할애하여 마지막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감내해야 하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과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슬픔을 그저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해 아빠와 함께 태우는 연주의 장면을 통해서다. 서로 모양이 다를 뿐, 쏟아져 나오는 슬픔도 삼키는 슬픔도 모두 슬픔이라는 사실을 프레임 가득히 채운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조금씩 흩어지고, 울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중요한 것은 생일과 기일 따위를 어떻게 부르고 챙기느냐 하는 일이 아니라는 진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연주가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마지막 한 마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마음이, 오랫동안 하지 못하고 묵혀뒀던 그 말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를 사랑하고 기억할 수 있는 문장이기를 깊이 바라게 된다. 할아버지의 그 뒷모습을 평생 잊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