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뤽 고다르(1930-2022). <네 멋대로 해라>부터 시작해 세계 영화역사를 수놓은, 혹자는 그를 마지막 '현대영화의 거장'이라 부를 만큼 거대한 족적을 남긴 예술영화 거장의 이름이다. 하지만 60년이 넘는 창작 기간 중 대부분의 작업은 난해하고 불친절하며 해석하기 어려운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기도 하다. 특히 그의 말년 작업들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보게 만들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고다르가 대중적인 재미를 끌어내기엔 소질이 없거나, 현학적인 영화를 고집한 건 아니다. 작정하고 만들기 시작하면 그는 SF건 갱스터물이건 로맨스건 천연덕스럽게 다 소화해내는 재능을 보여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관객은 여지없이 '낚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가의 면모 중 우리는 대개 '누벨바그'라 불리는, 1960년대를 수놓은 어떤 사조 아래 놓인 작품들 위주로만 접근하곤 한다. 그 중에도 정작 대표작 몇 편, 혹은 특정한 이미지 외에 그의 방대한 작업을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놀라울 만큼 드문 편이었다. 사실 우리는 고다르에 대해 여전히, 앞으로도 온전한 이해에 도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시절 고다르의 스타일과 잇닿아 있으면서도 장르 영화 외피를 둘렀기에 어떻게 보면 비교적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 하나가 60년 만에 국내 개봉을 맞이한다. <국외자들>은 고다르라는 거장이 어떻게 이전의 영화역사를 섭렵하고 이를 재구성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예시다.
소년, 소녀를 만나 범죄를 모의하다
▲ 영화 <국외자들>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파리 교외 부유한 이모 집에 얹혀 지내는 젊은 여성 '오딜'은 취업을 위해 수강하던 영어 수업에서 또래 청년 '프란츠'와 알게 된다. 오딜은 프란츠의 친구 '아르튀르'를 소개받는다. 진중한 성격의 프란츠와 달리, '나쁜 남자' 매력을 풀풀 풍기는 아르튀르에게 오딜은 자석에 끌리듯 반한다. 셋은 함께 프란츠의 자동차를 타고 특별한 목적 없이 돌아다닌다.
오딜은 별 뜻 없이 이모 집에 함께 사는 남자가 거액의 현금을 방에 감춰뒀음을 알린다. 이 사실을 안 프란츠와 아르튀르는 오딜을 회유해 돈을 훔치려 한다. 지나가는 화젯거리로 꺼냈던 오딜은 겁이 나지만, 두 청년은 이미 계획에 착수한 상태다. 이러다 큰일 날 것 같아 불안한 오딜은 거사를 앞두고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랬다가 저랬다가 끌려다닌다.
하오딜의 어설픈 준비 탓에, 이모는 자물쇠를 바꾸고 조심한다. 첫 번째 거사는 방심한 덕분에 실수 연발로 중단된다. 다시 거사 날짜를 정하고 이번엔 제대로 해치울 꿈에 부풀어 있지만, 호언장담과 달리 프란츠와 아르튀르 역시 제대로 해내는 게 없다. 계획이 어그러진 가운데 예상 못 한 사태가 속속 이어진다. 과연 이 불나방 같은 청춘들의 거사는 성공할 수 있을까?
<국외자들>은 고다르의 장구한 작품 연대기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익숙한 '누벨바그' 시절의 작품군에 속한다. 1960년대 초반의 프랑스 대중문화와 청년세대의 의식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테다.
프랑스, 특히 영화의 배경이 되는 파리는 중세 이후로 '유럽의 수도'라 불릴 정도로 번성하던 곳이다. 이는 문화예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부심 높던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독일에 패배하고 점령되는 굴욕에 휩싸였다. 정복자 독일군도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의 광적인 명령인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를 거부할 만큼 파리와 프랑스 문화에 대한 경외심을 품긴 하지만 위안이 되기엔 모자랐을 테다.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대륙에 승리자로서 새롭게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미국이 입성한다. 한쪽에선 소련과 냉전이 첨예화되고, 다른 한편으론 '마셜 플랜'이란 대규모 원조로 유럽 전체가 미국의 호의에 의지해 부흥하던 시절이다. 당연히 세계대전 때부터 미군과 미국의 풍요는 동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콧대 높던 프랑스도 미국 대중문화에 흠뻑 빠졌고, 미국 것이라면 뭐든 다 좋은 것이라는 예찬은 비단 동북아시아 가난한 분단국의 전유물이 아니던 셈이다.
전쟁의 참화로 프랑스 영화계가 침체하던 시절, 대서양을 건너 수입된 할리우드 영화는 프랑스 청년세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영화 속에서 오딜과 프란츠, 아르튀르가 첫 만남을 갖던 영어학원은 그런 시대 상황과 때어놓을 수 없다. 프랑스어에 대한 자긍심이 투철하지만, 먹고 살려면 영어를 배워두면 좋다는 풍조가 광범위함을 보여주는 장치다. 주인공들 역시 프랑스 자국 문화 못지않게 영미 대중문화 요소를 화제로 구사한다. 그만큼 미국이 서방세계를 주도하던 시절의 영향력이 곳곳에 짙다.
그런 문화적 경향은 <국외자들> 골격 자체에 결정적인 힘을 행사한다. 기본 전개와 핵심 사건만 추출해 본다면, 이 영화는 전형적인 '범죄 장르물'이다. 그것도 '하이스트 영화' 혹은 '케이퍼 무비'라 불리는 공식에 아주 충실하다.
<오션스 일레븐>이나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과 <도둑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들이 큰 건 벌리기 위해 다방면 능력자로 팀을 구성하고, 만만하지 않은 장애물을 돌파하는 과정이다.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 혹은 이합집산 배신이 감초처럼 가미되는 경향의 영화다. 고다르와 동료들의 미국 대중영화를 향한 경도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누벨바그 세대 감독, 그중에도 고다르는 유독 당시 상업영화에 불과하다고 치부된 장르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과거와 당대의 할리우드 거장들을 재해석하고 복권하는 데 힘썼다. 고다르는 청년 시절 즐겨보던 미국 범죄영화의 기본공식을 가져와 내용물을 바꿔치기하는 '전복'을 감행한다. 그래서 영화의 기본 얼개와 내용만 보고 작품을 단정하던 이들에게 망치로 한 대 맞는 것 같은 충격을 선물한다.
무의미하게 보이는 장면들에 감춰진 시대의 징후와 함의
▲ 영화 <국외자들>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국외자들>을 장르로 구분한다면 묶이게 될 상업적으로 유행하던 범죄영화 분야는 치밀한 두뇌게임과 뒤통수 반전, 치명적 매력의 선남선녀들로 채워지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 3명의 남녀는 서로 바보 같다며 뒤로 험담할 정도로 어딘가 맹탕이다. 심지어 성차별과 여성 혐오로 보일 대사와 상황도 속속 튀어나온다(영화가 60년 전 작품이란 걸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오딜 앞에서 능숙한 척 장담하던 프란츠와 아르튀르는 막상 실행 과정에서 어수룩함을 수없이 내보인다. 경찰이 오죽 무능하지 않고서야 잡히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오딜은 그런 둘에게도 휘둘릴 만큼 세상 물정 모르고 의지가 약한 존재다. 그럼에도 '누벨바그의 여신'이라 불리던 배우 안나 카리나가 담당한 겁 많고 어리숙해도 호기심 가득한 큰 눈으로 두 공범은 물론 화면 밖 관객을 쳐다볼 때 '심쿵'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들의 결함은 이들이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표상으로 그려진 면모다. 몇 년 후 '68혁명'으로 통칭하는 거대한 불길에 휩싸이기 직전 예열단계가 <국외자들> 제작 시기인 것이다. 기성세대는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고, 나라를 빼앗기거나 부역했으면서도 반성하거나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부모세대와 충돌은 일삼지만, 달리 새로운 비전이나 미래를 개척하기엔 막막한 현실 앞에 좌충우돌하는 청년세대 초상이 영화 속 오딜과 프란츠, 아르튀르인 셈이다. 자신들이 정한 적 없는 냉전과 식민지 전쟁, 기득권 지배구조 앞에서 이들은 확 세상 다 불 질러 버리고 싶거나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품는다.
주인공들의 심리는 느닷없이 돌출하는 순간들로 형상화되곤 한다. 범죄를 모의하러 온 카페에서 갑자기 벌이는 댄스 장면은 대체 무슨 상황인지 혼란하던 관객의 시선을 곧 고정해버릴 만큼 매혹적인 찰나다. 맥락도 당위도 없지만, 그들이 뭔가 주체적으로 실행하려는 순간에 분출하는 생명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아무 개연성이 없는, 눈을 떼지 못하는 유튜브 '쇼츠'의 매력과 통한다. 그리고 어느 미국인이 감행했다던, 루브르 구내를 달려 9분대에 주파했다는 일화를 듣고 질 수 없다는 듯 셋이 감행하는 질주 장면은 공공시설 이용예절로는 낙제점일지언정 유쾌한 쾌감 그 자체다. 저렇게 활짝 웃으며 넓은 실내를 뜀박질한다는 상상을 누가 쉽게 할 수 있으랴.
기성세대의 악덕에서 탈주하려는 청년세대의 저항
▲ 영화 <국외자들>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이들의 공모를 눈치채고 선수를 치려는 다른 세력이 등장한다. 막판 긴장을 고조시키는 그들은 청년들을 우습게 여기는 산전수전 다 겪은 집단이다. 인도차이나 식민지 전쟁 경험도 있다며 어린 세대를 아래로 여기는, 그렇지만 당시 디엔비엔푸와 알제리에서 과거 식민제국 영화를 움켜쥐려다 처참하게 패배한 역사를 목격한 청년세대에게 그들의 장광설은 발목 잡기에 불과할 뿐이다. 청년세대를 착취하는 기성세대와 그들의 지배문화에 침을 뱉고 새롭게 출발하고픈 주인공들의 방황이 <국외자들>을 휘감은 대책 없이 무의미해 보이는 전개의 중심축으로 기능한다.
물론 그런 출구 없는 저항이 정돈된 '혁명'이나 조직화로 이어지긴 쉽지 않다. 주인공들의 나사 빠진 행동이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이다. 하지만 기성세대에 편입되는 것보다 눈부신 혼란이 더 낫지 않겠냐는 시대정신이 장르 공식을 전형적으로 추종하듯 위장한 <국외자들> 안에서 매복한 채 관객을 엄습할 채비 중이다. 그런 속성을 파악한다면 영화는 전혀 난해하지 않다.
뚝뚝 화면을 잘라먹는 '점프 컷'이나 느닷없이 감독이 내레이션으로 상황을 해설하는 장면 역시 그저 예술영화 거장의 전매특허로 과시한 게 아니다. 작품이 전하고픈 주제의식 및 심리묘사에 최적화 방식으로 구사된 것임을 간파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다. 기존에 물려받은 것들을 활용하되 의미를 탈바꿈시키던 누벨바그의 정신이 구현된 또 하나의 소중한 예시를 60년이 지나 목격해보자.
[작품정보]
국외자들
Band of Outsiders
1964 프랑스 코미디/범죄/드라마
2024.09.25. 개봉 96분 12세 관람가
감독 장 뤽 고다르
출연 안나 카리나, 사미 프레이, 클로드 브라쇠르
원작 돌로레스 히친스 소설 <바보의 황금>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주)
▲ 영화 <국외자들> 포스터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