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이 17일 오후 인천 SSG 랜더스필드에서 경기 종료 후 2024 KBO 정규리그 우승을 축하하고 있다. ⓒ 기아타이거즈
여섯 살 때쯤 아버지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광주 무등경기장에 갔던 그 순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평생 기아 타이거즈를 응원하겠구나. 30년 가까이 타이거즈 야구를 보면서 사연 없는 우승은 없었지만, 2024년 정규리그 우승은 그 어느 때보다도 드라마틱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전문가들이 기아를 전력상 강팀으로 분류하기는 했지만, 시즌이 시작하기 전부터 끝날 때까지 바람 잘 날 없는 여러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1. 80년대생 감독의 형님 리더십
올해 초 스프링캠프를 떠나기 전,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감독이 계약 해지되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기아 프런트는 부랴부랴 새 감독 선임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후보가 물망에 올랐지만 최종 선택은 1981년생의 젊은 이범호 감독이었다. 최초의 80년생 감독이 탄생한 순간이다. 일부 베테랑 선수들은 감독님에게 '형'이라고 부를까봐 조심스럽다고 밝히기도 했다.
가장 젊은 감독인 만큼 팬들은 응원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우려의 시선도 분명 존재했다. 단 10자리만 존재하기 때문에 야구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영광이기도 하지만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독의 작전 하나, 선수 기용 하나가 패배로 직결되는 순간에는 언론 보도는 물론,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등에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특히 기아는 전국 어디를 가나 구름같은 팬들을 몰고 다니는 전국구 구단이어서, 다른 팀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가게 된다. 지난 7월 마지막 날, 두산 베어스와의 홈 경기에서 30점을 주는 '역대급' 패배 경기 이후, 정규 시즌 1위를 달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독의 경기 운영을 비판하는 트럭 시위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독은 이른바 '형님 리더십'을 바탕으로 묵묵히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 선수 시절부터 기아에서 뛰면서 팀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줬던 그는 코치 시절부터 선수들과 관계가 돈독했다. 승리를 위해 팀의 고참 투수이자 '대투수'로 인정받는 양현종을 조기에 강판시키면서도 뒤에서는 백허그를 하는 모습, 쉬는 시간에 선수‧코치들과 어우러져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모습 등을 보면 감독과 선수들이 돈독하게 '원팀'으로 뭉쳐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2. 신구 조화를 통한 부상 악재 극복
144경기를 치르다 보면, 선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팀에 있는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체력을 안배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시즌이 끝나가는 지금, 기아에서 시즌 초에 시작한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고 있는 선수는 양현종이 유일하다. 외국인 선수 크로우의 자리는 벌써 두 번의 교체가 있었고, 젊은 영건 이의리와 윤영철은 부상으로 시즌을 소화하지 못했다. 8월 말에는 2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던 제임스 네일이 상대편 타자의 타구에 안면을 직격 당하는 부상을 입는 등, 악재가 참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준비돼 있던 젊은 투수 황동하·김도현 등이 기회를 잡았다. 이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름대로의 자기 몫을 하면서 구멍난 선발진을 잘 메워 주었다. 마무리 투수인 정해영이 이탈했을 때에도 전상현이 뒤를 맡아 주면서 부상 악재를 잘 극복해 나갔다.
투수진뿐만이 아니었다. 개막 전 4번 타자로 낙점했던 나성범이 햄스트링 부상으로 초반 경기를 많이 뛰지 못했고, 베테랑 최형우와 김선빈 등도 몇 주간 부상으로 자리를 비우곤 했다. 비워진 자리는 젊은 선수들이 그때그때 자리를 채워 주었고, 부상에서 복귀한 베테랑들은 또 다시 제 몫을 해 주었다.
특히 1983년생 베테랑 최형우는 나이를 잊은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다. 부상이 없었다면 최고령 타점왕에도 도전할 수 있을 만큼의 성적을 내 팬들에게 '04년생 최형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이처럼 주전 선수들의 부상 공백을 서로서로 잘 메워 준, 베테랑 선수들과 젊은 선수들의 신구 조화가 기아 정규시즌 우승의 동력이 됐다.
▲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최형우 ⓒ KIA 타이거즈
#3. 슈퍼스타 김도영의 탄생
해태 때부터 기아에 이르기까지, 한국시리즈 우승 11번에 빛나는 타이거즈에는 수많은 스타 선수들이 있었다.
20세기에 이 정도로 혜성처럼 임팩트를 준 선수가 있었을까. 프로 3년차인 이 선수가 2024년 보여준 퍼포먼스는 전국의 기아 팬뿐만 아니라, 모든 야구 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다. '슈퍼스타' 김도영 이야기다.
타격, 파워, 수비, 송구, 주루 등 모든 것을 갖춘 이 선수는 과거 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끈 이종범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제2의 이종범'이 아닌 '제1의 김도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김도영은 올 KBO 최초 월간 10홈런-10도루, 최소경기 30홈런-30도루, 최소타석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 단일시즌 최다득점 등 경이로운 기록을 써가는 중이다. 시즌이 끝나지 않은 지금, 국내 선수 최초로 40홈런-40도루에 도전하고 있다. 이런 놀라운 기록들을 바탕으로 기아의 1위를 견인하고 있고, 유력한 정규시즌 MVP 후보로도 거론된다.
인터뷰 때 보여주는 언행이나 팬 서비스 등에서도 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하려는 겸손함이 묻어난다. 야구선수 중에는 사생활 논란으로 구설수에 오르거나 야구계를 떠난 선수들이 심심찮게 있다.
김도영의 마음가짐은 인터뷰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항상 야구장에서 좋은 플레이와 아무 논란 없이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선수가 되겠다"고 말하는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기아 타이거즈 김도영 선수 ⓒ 기아타이거즈
그의 유니폼은 압도적으로 구단 판매량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유니폼 판매량에 따른 인센티브는 연봉을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경기가 있는 날, 광주 챔피언스필드를 둘러보면 김도영의 유니폼을 입은 수많은 팬을 볼 수 있다. 한 팬이 스케치북에 적어서 TV에 등장한 도니살(도영아 니땀시 살어야)이라는 표현은 수많은 기아 팬들의 유행어가 됐다. 아직 나이는 스무 살. '타이거즈 왕조'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만큼, 그가 걸어갈 슈퍼스타의 길이 기대 된다.
이제 기아는 2024 정규시즌 우승을 넘어, 1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정조준하고 있다.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에서 진 적이 없는 전설을 이어가야 하는 만큼, 선수들의 심적 부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규 시즌에서 보여줬던 분위기라면 다시 한 번 팬들에게 큰 기쁨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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