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테인티드 러브>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널 만나게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시작과 함께 저우란(주동우 분)과 아창이라고 불리는 남자와의 텍스팅이 등장한다. 베이징에서 동시통역 일을 하며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여자와 동남아 모 국가에 머물고 있는 정체불명 남자의 장거리 관계다. 밤마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문자와 음성 메모에는 달콤한 사랑을 노래하는 말들이 가득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두 사람이 아직 한 번도 직접 만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어서다. 어플을 통해 만나거나 장거리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 관계 어쩐지 조금 이상해 보인다. 그리고 55만 위안, 우리 돈으로 약 1억 원의 금액이 여자로부터 남자에게 송금되는 순간 그는 신기루처럼 완전히 증발해 버리고 만다. 로맨스 스캠, 사기다.
영화 <테인티드 러브>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샤주판(Sha Zhu Pan)'으로 불리는 중국식 사기 범죄다. 영어로는 'Pig butchering scam'이라고도 불리는데, 직역하면 '돼지를 도살하는 사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범죄의 핵심은 타깃으로 정해진 대상을 정확히 설계된 계획과 달콤한 언어로 속이는 일이다. 범죄자는 돼지에게 먹이를 줘 살찌우는 것처럼 피해자의 마음을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고 기만하여 정확히 만들어진 사실을 심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도살, 모든 환상을 깨뜨린다. 이 작품에서는 55만 위안이 송금되는 순간이다. 어떤 누가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사기에 빠질 수 있을까 싶지만, 오랜 연습과 다양한 실전으로 훈련된 사기범 앞에서 일반인은 순진한 사냥감일 뿐이다.
02.
돈을 송금하기 전부터 예감은 했지만 도박이라도 해보고 싶었다는 저우란의 마음이 자신을 속인 사기꾼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르기 전에는 발을 뻗고 잘 수 없다는 쪽으로 바뀌면서 영화의 전개는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사건 9개월 후, 푸젠성의 해안 도시를 찾아 남자를 잡으러 다니는 그의 모습이 보여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사랑에 가까운 이야기를 속삭이며 통화를 하던 당시 상대가 했던 말들을 단서 삼아 홀로 추적해 가기 시작하는 저우란. 하지만 알게 되는 것은 당시에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정보가 가짜였다는 사실 뿐이다. 심지어 '아창'이라는 이름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정보다.
홀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유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다. 영화에서도 잠시 비춰지듯이 경찰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사건을 접수해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넓은 중국 땅에서 이런 종류의 사기는 너무나 흔하고, 그마저도 저우란의 경우에는 정확히 알 수도 없는 해외에서 시작된 범죄에 해당한다. 그나마 또 다른 로맨스 스캠의 피해자인 팡닝(이몽 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기까지라도 따라올 수 있었다.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도 알릴 수 없으니 피해자 사이의 연대가 아니었다면 내내 혼자였을 것이 분명하다.
사건의 실마리는 우연한 기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도시에 머무는 동안 여행사를 운영하는 쉬자오(장유호 분)와 그의 친한 형인 린즈광(장위 분)을 만나 어울리게 되는데, 저우란은 린즈광의 목소리가 자신이 기억하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 아창의 것과 닮은 것 같다고 느낀다. 그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단서이자 용의자다. 이제 남은 것은 그가 자신을 속인 범죄자임을 확정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내는 일과 복수하는 것. 이를 위한 위험한 접근과 명확하지 않은 감정 사이에서의 연극이 시작된다.
▲ 영화 <테인티드 러브>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03.
로맨스 스캠과 같은 소재를 다루는 영화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해당 서사의 결말은 권선징악의 모습이나 진실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멜로 장르의 형태가 될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안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모양이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애초에 그럴 의도가 없어 보인다. 중심인물이 사기를 당했다는 핵심 설정을 시작부터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더 매력적인 이야기를 성해 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어쨌든 마영심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 이후의 사정에 가깝다.
이 영화는 저우린이 서사를 진행시켜 나가는 과정에 있어 주요 인물 세 사람이 형성하는 삼각관계에 가장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저우란과 쉬자오, 그리고 린즈광의 서로 엇갈리는 감정과 관계 설정을 로맨스 스캠의 서사 위에 구축하며 이 이야기를 사랑과 범죄 사이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문제는 그 경계가 정확하지 않고 모호하다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저우린이라는 인물이 복수라는 명확한 목적을 두고 두 남성 사이를 부유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전체 과정의 장면들 속에서는 확신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오히려 저우린이 취해서 잠든 사이 핸드폰의 음성 메시지로 두 남성의 정체를 알게 된 팡닝이 오래 미뤄올 수밖에 없었던 복수의 서사에 마침표를 찍고자 하는 모습이 오히려 또렷하게 보일 정도다. 이 작품의 원제인 '앵무살(鹦鹉杀)' 즉,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기꾼들의 달콤한 거짓말을 처단해야 한다'의 의미와도 더 상응하는 것 같다. 지금 저우린이 보여주는 모습에는 사랑도 복수도 아닌 어딘가 미적지근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나는 이 문제가 의도된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04.
영화의 서사와 별개로 안개를 극의 주요 메타포로 사용하고 있는 점은 유일한 성과처럼 보인다. 깊은 의미를 담아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세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공간, 관음상이 서 있는 섬을 중심으로 해안 도시에 짙게 깔리는 안개는 영화 전반에 자리하고 있는 불확실성을 은유적으로 잘 보여준다. 수화기 너머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사기꾼의 목소리, 오래 찾을 수 없었던 범인의 존재에 대한 부분이다. 후반부에서 도로를 내달리다 사고를 당하는 쉬자오의 모습이나 함께 샤먼행 기차에 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 역시 안개의 이미지와 함께 불투명한 미래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다.
세 사람이 밤새 술을 마시다 붉은색 스카프를 두고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부분 또한 다시 들여다볼 만하다. 영화의 주요 소재인 스캠 사기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에 대해 구조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장면이어서다. 린즈광은 이 스카프를 초록색이라고 말하고, 쉬자오는 보이는 대로 붉은색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이 사실과 거짓으로 엇갈릴 때, 저우란은 린즈광의 편을 들며 사실이 아닌 거짓을 택하며 초록이라고 대답한다. 붉은색 스카프는 그렇게 초록색이 된다. 세 사람 중에 두 사람이 초록색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진짜 사실보다 다수가 그렇다고 선택한 쪽의 답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사기 피해자들의 모습이 그렇다. 그들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 가운데 사실보다 잘 설계된 거짓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종국에 믿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 영화 <테인티드 러브>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05.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영화의 말미에서 갑자기 권선징악의 내용으로 핸들을 급하게 꺾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다. 저우란을 또 한 번 속이기 위해 접근하는 것처럼 보이던 린즈광이 동전의 운까지 빌리며 사랑을 향해 갑자기 걸어가는 것도 그렇고, 사랑과 복수 사이의 감정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던 저우란이 복수에만 몰두했던 것처럼 그려지는 것에도 조금 어색한 감각이 남아서다. 점점 늘어만 가는 사회적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로맨스 스캠 사기에 대한 선전 영화가 아니라면 이 영화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다양한 작품 속에서 강한 이미지를 남긴 주동우 배우의 모습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특히 그의 슬퍼하는 모습,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울기 직전의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상태의 표정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작품 속 저우란에게서 눈을 떼기란 쉽지 않다. '테인티드 러브(Tainted love)', 더럽혀진 사랑이라는 영문 원제만 보더라도 그가 어떤 모습일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않나. 실제로 그는 이 작품에서도 운다.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