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사로 배를 탄 이력이 있기 때문일까. 배가 나오는 영화엔 유독 마음이 간다. 그 배가 태어나는 곳, 조선소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 조선소 이야기는 전혀 경쾌하지가 못하다. 전 세계 바다를 가로지를 커다란 배가 탄생하는 곳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을 만큼 우중충한 기운만이 가득하다. 경기가 좋지 않고, 회사는 휘청거리며, 구조조정이란 이름의 대규모 인력감축안이 논의된다.
나라를 떠받치는 산업역군이란 자부심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래 몸담아온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조선소 내에 팽팽하게 감돈다. 누가 구조조정 대상인가를 두고 피가 마르는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일 잘하는 대리에게 떨어진 불쾌한 업무
<해야 할 일>은 조선소 인사팀 직원들의 이야기다. 구조조정 대상자를 선정하고 그들에게 회사를 나가줄 것을 통보해야 하는 일이 어떻게 상쾌할 수가 있을까. 남의 밥줄을 끊는 일이다. 그 무게를 생각한다면 누구도 감히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선뜻 나설 수 없을 테다. 이런 일이란 잘 해내려 들수록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것이 아닌가.
인사팀 분위기는 그야말로 우중충하다. 다른 팀에 있다가 인사팀으로 갓 발령이 난 젊은 대리(장성범 분)에게 선배 이 차장(서석규 분)은 부서 분위기가 최악이라며 불평한다. 차석인 부장(김영웅 분)은 수시로 수석인 인사팀장(김도영 분)에게 들이받는다. 고함이 오가는 사무실에서 일거리는 죄다 이 차장 몫이다. 전문대 졸업자인 여자 대리(장리우 분)는 매번 허드렛일만 하는 신세다. 가뜩이나 손발 안 맞는 이 부서에 구조조정이란 태풍까지 닥쳐오니 무사히 계절을 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기실 한국 조선소는 구조조정에 익숙한 업계가 된 지 오래다. 구조조정이 무엇인가. 법에 따라 부실한 징후가 있는 기업으로 하여금 인력과 조직, 임금 등을 개선하도록 한 조치다. 수입은 없는데 지출만 커서 마침내 기업이 고꾸라질듯하니, 먼저 살을 깎는 심정으로 지출을 줄이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회사를 살리려 노동자를 쳐내는 일이다. 노동자 개인의 입장에선 결코 반가울 수 없는 일이다.
조선업계가 구조조정에 익숙해진 게 벌써 십수 년이 더 된 이야기다. 1970년대 정주영 현대 회장이 맨주먹으로 영국과 그리스를 오가며 조선기술 이식과 차관대출, 유조선 수주까지를 따내어 당시 시가의 3할가량으로 배를 지어 공급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한국 조선업의 출발을 알리는 이 신화 이후 반세기 가까이가 지나는 동안 조선업은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기틀을 이뤘다.
조선강국 신화 뒤 숨겨진 이야기
그러나 생각해보자. 한국이 싼 값에 배를 지어 납품할 때 어느 나라 조선소는 손 놓고 일거리를 잃어야 했을 테다. 누군가가 계약을 따내면 누군가는 잃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30% 가격의 덤핑계약이라면야.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러 조선강국이 된 한국은 정반대 처지에 놓였다. 후발주자로 싼 인건비와 거대한 부지를 갖춘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등이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일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특수선박을 중심으로 새로운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긴 했으나 변해버린 지형은 위기를 지속하게 만들었다.
업황 또한 좋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거듭돼온 경제위기는 꾸준한 일감을 수주하는 데도 악영향을 끼쳤다. 좋을 때 불려놓은 몸집을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된 업체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 이것만이 이유겠는가.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조선소들이 수시로 뉴스에 오르내린 일을 이 나라 깨어 있는 시민은 기억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2007년 삼성 비자금 조성 의혹을 폭로한 전 삼성 임원 김용철 변호사는 저서 <삼성을 생각하다>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무렵 삼성중공업은 조선부문 매출이 2조 원쯤 됐다. 이런 회사에서 2조 원 분식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회계 감사를 맡았던 삼일회계법인 소속 회계사들에게 돈을 엄청나게 뿌렸다. 저녁마다 룸살롱에 데려갔다. 결국 텅 빈 거제 앞바다에 건조 중인 배가 여러 척 떠 있는 것으로 처리하면서 막무가내로 회계를 조작했다. 이 과정에서 부실관계사 정상화 TF팀이 꾸려졌고, 수없이 많은 회의를 했다.
분식회계로 감춰진 비용은 어떻게든 메워 넣어야 했다. 화장실 불 끄고, 화장지 없애는 식으로 10여 년에 걸쳐 해결하기로 했다. 물론, 이보다 더 강력한 수단은 구조조정이었다. 당시 6만 명이 삼성에서 쫓겨났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당시 분식된 부분을 꽤 털어냈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이처럼 노골적인 분식회계를 알면서 용인한 회계법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본다. -367p
국민적 기대를 받으며 출발한 조준웅 특검은 김 변호사의 고발내용을 얼마 입증하지 못했다. 특히 삼성중공업 관련 내용은 기소에도 이르지 못했다. 특검 수사결과 발표엔 '삼성중공업이 분식회계를 숨기기 위해 허위의 선박을 자산에 계상했다는 주장과 관련해 회계자료를 검토한 결과 혐의사항을 확인할 수 없었으며'라는 문구가 등장할 뿐이다. 이후 신문에 조 특검 아들이 삼성전자 과장으로 입사했다는 보도가 실렸단 걸 기억하는 이가 아직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성, 대우, 한진... 한국 산업의 어두운 이면
이 같은 문제가 삼성중공업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경영진이 수년에 걸쳐 회계를 조작하고 성과급 잔치를 비롯한 방만경영을 벌인 대우조선해양 사례는 일터에서 사명감을 갖고 묵묵히 일하는 일꾼들을 허탈하게 한다. 정치와 선이 닿은 낙하산 인사들이 정부 자금이 투입된 대우조선해양에 임원으로 온 뒤 온갖 수단을 동원해 돈 잔치를 벌였던 사건이다. 산업은행의 부적절한 관리에 더해 회계에 손을 댈 만큼 부도덕한 경영진과 회계사들이 맞물려 총체적 부실을 빚었다.
이를 회복하는 데만 공적자금이 10조 원이 넘게 들어갔다.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했는가. 또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하청과 외주로, 체질변화라는 미명 아래 뒤바뀐 근무환경은 또 얼마나 많은 문제를 낳았는가 말이다.
노동자 구조조정과 관련해 지리한 갈등을 빚었던 한진중공업은 또 어떤가. 조세 피난처인 홍콩과 사이프러스의 법인을 거쳐 필리핀 수빅 조선소에 투자한 한진중공업은 현지에서 거듭된 산재사건과 노동자들의 시위, 숙련되지 못한 노동력과 그로 인한 경쟁력 하락 등으로 경영에 커다란 실패를 겪었다. 결국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필리핀 등에서 조성한 자금을 상환하지 못했다. 큰돈을 투자해 건설한 조선소는 그대로 필리핀 정부 소유로 돌아갔다.
이 같은 문제를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구조조정과 고용불안 앞에 놓인 노동자 개인과 그 가족의 고통이 얼마나 부당한 것이었는지를 실감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직접 경험한 인사팀의 현실로부터
박홍준의 <해야 할 일>은 감독 스스로가 경험한 조선소 인사팀의 현실을 여실히 표현한 작품이다. 극영화라고는 하지만 현실 가운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실적 사건들을 배치해 회사와 노동자, 인사팀과 노조, 회사 내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집단과 개인의 선택을 비춘다. 그들이 삶을 지탱하는 동력과 가치를 은근히 내보이며 진실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살피려 든다.
영화의 핵심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비추는 것이다. 구조조정의 틀을 빌려 평소 사측 눈 밖에 난 이들을 쳐내려는 사측의 움직임을, 한때는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주인공이 떠맡는 과정에서 좋은 직원과 좋은 시민, 또 좋은 인간의 길이 갈라지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비단 영화 속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단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많은 예산을 들인 영화도 아닌 데다 조선산업에 대해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작품이 아니다 보니 어려움도 따랐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관하는 독립영화 쇼케이스 211회차 상영 뒤 박 감독은 촬영장 섭외부터가 만만찮은 일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박 감독은 "규모감 있는 곳 중에서 허가를 해줄 곳이 없었고 전국 조선소를 찾아봤지만 영세한 조선소는 시나리오와 괴리가 있어 배제할 밖에 없었다"며 "제작사 대표님 지인찬스로 수리조선소를 알게 돼서 촬영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꼭 담고 싶었지만 담지 못한 장면
이 과정에서 아쉽게 영화에 담지 못한 핵심적 장면도 생겼다. 박 감독은 "굉장한 대인원이 출근하는 모습을 꼭 찍고 싶었다"며 "조선소는 엄청난 대인원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광경이 볼만한데, 그 규모감을 (수리조선소에서 연출해서는) 찍을 수가 없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규모감을 관객 앞에서 보여줄 수 있었다면 <해야 할 일>은 지금보다도 멋진 영화가 됐을 것이 분명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걸 알고도 상황의 제약 탓에 할 수 없었단 게 한 명의 평자로 보기에도 안타깝기만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비추는 이야기가 이 시대에 충분한 의미를 전할 수 있다고 여긴다. 비단 영화 속 인물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윤택한 삶과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삶 사이에서 고민할 일이 적지 않은 탓이다.
몰락의 징후가 곳곳에서 엿보이는 오늘의 한국사회 가운데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고민하는 이가 너무나도 간절하다. 이 영화가 꼭 그러한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 나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이가 여기 또 하나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