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딸에 대하여>의 주인공 정은(오민애 배우)

영화 <딸에 대하여>의 주인공 정은(오민애 배우) ⓒ 찬란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음식을 만들고, 먹고, 나눠주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식탐이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나 책을 볼 때 음식이 등장하면 마치 흑백 배경 속 유일한 컬러 오브제처럼 눈에 톡 들어온다.

영화 <딸에 대하여>에는 많은 음식이 등장하는데,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내내 머릿속에 그 생각들이 맴돌았다. 영화 속 음식들을 중심으로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긴 글이 됐다.

노인전문요양병원에서 일하는 엄마 정은(여/오민애 배우)은 자신이 돌보는 어르신(여/허진 배우)을 마음을 다해 모시는 노련하고 성실한 요양보호사다. 자신의 일을 기계적으로 행하기보다는 늘 섬세하게 임하는 만큼, 다른 요양보호사들에 비해 더 많은 시간과 물품을 사용하게 되면서 관리자로부터 눈총을 받곤 한다.

어느 날 그녀의 딸이 '엄마 집 담보로 전세보증금을 좀 마련해달라'고 부탁하는 연락을 해온다. 하지만 정은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전혀 없다. 결국 정은은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일단 내 집에서 같이 지내자 제안하고, 딸(임세미 배우)은 자신의 레즈비언 애인(하윤경 배우)과 함께 정은의 집으로 들어온다.

정은의 딸은 '그린', 그 애인은 '레인'이라는 닉네임으로 서로를 호명하고, 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은 정은과는 너무도 달라 낯설기만 하다. 그린은 대학 시간강사, 레인은 요리를 공부하며 글을 쓰는 프리랜서로, 둘 다 안정적 경제 능력은 부족한 상태다. 그린과 레인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부당 해고당한 선배를 위해 투쟁 중이고, 정은에겐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결국 발각되어 모녀는 말다툼을 한다.

요양병원에서 정은이 맡아 돌보는 어르신은 과거 전 세계 소외아동을 후원하는 재단 활동을 하며 존경받았던 인물이나, 현재는 자신을 돌봐줄 가족이 전혀 없는, 한마디로 무연고 노인이다. 효율과 수익만을 우선시하는 요양병원 입장에선 그 어르신도, 정은도, 눈엣가시에 불과할 뿐이다. 정은은 자신이 며칠간 출근을 못 한 사이 어르신이 알 수 없는 요양원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렵게 수소문 끝에 찾아내지만 너무도 달라진 모습으로 누워계신 어르신을 보곤 충격에 빠진다.

음식도, 말도, 상대가 수용 가능할 때 건네는 것

그린과 레인의 입주 이후, 정은의 부엌엔 평소 볼 수 없었던 드립 커피 도구와 아기자기한 주방용품들이 놓이기 시작한다. 수박을 조각으로 잘라 접시에 담아서 먹을 의욕조차 없어서 수박 반 통을 그냥 놓고 멍하니 수저로 푹푹 떠서 먹었던 정은에게,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그린/레인 커플의 아침 주방 풍경은 참으로 이질적이다.

나는 냉큼 화면 속으로 뛰어 들어가, 정은에게 속이 부대끼지 않을만한 음식들로 한 상 차려주고 싶었다. 내가 그런 오지랖 넘치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린/레인 커플이 정은에게 권하는 음식들은 너무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 늦은 저녁 무렵 '생각보다 맛이 괜찮으니 드셔보시라'며 권하던 파스타
​- 아침부터 온통 고민과 피로감에 속이 부대낄 정은에게 '금방 내렸다'며 권하는 커피
- 브런치 카페에서 팔 법한, 세련되고 예쁘게 플레이팅된 수플레 팬케이크

그 모든 음식이 적어도 내 기준엔 정은에게 도달할 수 없는 음식들이었다(결코 지금 그녀의 위장이 소화해낼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모두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좋아할 만한 음식들이지만, 그것은 마치 여우가 두루미에게 납작한 접시에 담아 권하는 음식처럼, 찌르는 듯한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는 내내 '속이 온통 복잡할 사람한테 저걸 권하고 싶냐'는 혼잣말을 입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나라면 부드러운 계란찜과 갓 지은 쌀밥에 버섯을 띄운 미소 된장국, 혹은 뜨거운 보리차에 끓인 찹쌀 누룽지와 김 장아찌로 상을 차려주고 싶었다.

​어찌 보면 음식이란 언어와도 비슷해서, 말이든 음식이든 누군가에게 건넬 때는 상대가 수용 가능한 상태인지(모국어가 무엇인지/청력은 어떤지)를 충분히 파악한 후에 건네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출발어가 아닌 도착어를 기준으로 마음 쓰고 그렇게 행하는 것. 모름지기 돌봄 월드의 네이티브 스피커라면 출발어(원어)를 고집할 게 아니라, 도착어(번역어)를 위주로 사고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화면 속 젊은 커플을 내내 괘씸히 여기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까탈스런 식구들 간식 심부름하며 온갖 타박과 불만을 소화해온 노하우를 가진 나로선 '성공적으로 비위 맞추기'에 대한 욕망이 있는 편이라, 그린/레인 커플을 더욱 못마땅히 여겼던 것 같다.

'덜거덕' 입에 넣어주는 알사탕의 온기

 극 중 정은(오민애 배우)이 돌보는 어르신(허진 배우)

극 중 정은(오민애 배우)이 돌보는 어르신(허진 배우) ⓒ 찬란


우리가 말이나 음식을 건넬 때, 내가 발 딛고 선 위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건네는 경우는 흔치 않은 듯하다. 때로는 양손을 입에 대고 멀리 외쳐야 할 때도 있고, 때론 귓전에 가까이 대고 또박또박 말해야 할 때도 있고, 상대에게 내 입 모양을 확실히 보여주며 말해야 할 때도 있다. 밥이 담긴 숟가락이 비행기라도 되는 양 '붕~' 소리를 내며 종횡무진 움직이다 입에 넣어줘야 할 때도, 조금씩 호호 불어서 조심스레 입에 넣어드려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발신자가 아닌 수신자에게 최적화된 배달 서비스. 여기에서부터 돌봄은 시작되는 것 아닐까.​

불편하게만 느껴졌던 그린 커플의 음식 권하기와는 달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불쑥 입속으로 덜거덕 알사탕을 밀어 넣어주던 어르신의 손길은 어떤가. '이 사람 지금 달달한 게 필요하겠구나'하는 어르신의 본능적 마음 씀이라 추측했다면 내가 너무 오버일까. 영화 중반부쯤 정은이 어르신의 입에 사탕을 넣어드리는 장면에서도 역시 나는 비슷한 따뜻함을 느꼈던 것 같다.

똑,똑, 짧은 두 번의 노크 직후('들어오라'는 말을 채 듣기도 전에) 불쑥 정은의 방문을 열자마자 자신의 용건부터 '예의 바르게'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레인이 내겐 더없이 불편하게 여겨졌던 반면, 예고도 없이 투박한 손길로 사탕을 입에 넣어주는 어르신의 손길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정중하게 미리 양해를 구하지만 마음을 찌를 수도, 예고 없이 불쑥 들어오지만 마음을 보듬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정작 중요한 건 세련된 형식이 아니라 상대의 컨디션을 먼저 살피고 감각해내는 마음 씀 아닐는지.

내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레인이 정은에게 죽을 끓여와 권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렇지, 네가 이제서야 눈치가 좀 돌아가는구나'하고 속으로 중얼대며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은이 어르신을 요양원으로부터 구출(?)해 집으로 모셔온 이후부터 커다란 변화 국면을 맞는다. 어르신이 절구를 꺼내 곡식을 빻겠다고 집안 마룻바닥을 온통 어질러 놓았던 그 장면. 레인은 정은이 옛날에 사용했던, 지금은 쓰지 않아 처박아둔 낡은 전기 팬을 꺼내어 빵을 구웠다. 어르신은 정말 모처럼 빵을 맛있게 드셨고, 모두가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나는 이 장면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는데, 한편으론 불가능한 판타지인 것만 같아서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제약 없는 상상을 마음껏 하는 것이야말로 사회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말한 것처럼,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자신을 불태웠던 전태일 열사도 생전에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 세계의 모습을 시놉시스 형식을 빌려 구상해두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네 식구가 낡은 전기 팬에 구운 따뜻한 빵을 나눠 먹는 그 장면에서야, 음식이 더 이상 사람을 찌르는 것이 아닌, 사람을 이어주고 채워주는, 그야말로 '진짜 음식'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앞서 내내 답답했던 마음이 충분히 해소됐다. 뜬금없이 예수와 열두제자 최후의 만찬이 떠올랐다. 이 장면이 최후의 만찬을 능가하는 스펙터클한 만찬처럼 느껴졌다. 돌봄러들의 신나고도 즐거운 대환장의 오찬.

냉담자인 내가 가물에 콩 나듯 가는 성당에서 종종 듣는 말 중에 '말씀이 사람이 되어...'라는 구절이 있다. 엔딩 장면이 씁쓸한 판타지처럼 느껴졌다고 했던 건 '만약 정은이 어르신을 집으로 모셔오지 않았다면, 정은/그린/레인이 이런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진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만지고 부대끼고 냄새 맡으며 겪어봐야만 학습해갈 수 있는, 한계투성이 인간이 아닌지. 깨닫고 변화하려면 말씀만으론 부족하다. 말씀이 육화된 존재, 한 사람이 내게로 직접 와야만 하는 모양이다.

따뜻하고도 견고한 공동체

 레인(하윤경 배우)과 정은의 라이프스타일은 특히 주방에서 극명하게 대조된다

레인(하윤경 배우)과 정은의 라이프스타일은 특히 주방에서 극명하게 대조된다 ⓒ 찬란


얼마 전 읽었던 <돌봄선언>(더 케어 컬렉티브 저)을 보면, '난잡한(promiscuous) 친족모델'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난잡한(promiscuous)'은 주로 성적 문란함을 뜻하는 부정적 단어로 자주 쓰이지만, 이 책에서는 '돌봄의 관계를 맺는 데 대상을 구별 또는 차별하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돌보며 그 관계를 무한히 증식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됐다.

영화 <딸에 대하여>에는 혈연/비혈연/레즈비언/스트레이트/노인/중년/청년 등 그야말로 난잡하게 섞여 있는 이들이 형성해낸 따뜻하고도 견고한 유대가 있다. 이들과의 동거에선 돌봄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닐 것이고, 이들과의 밥상에선 방귀 소리도 부끄럽기보단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약자의 곁을 지키려는 정은, 그리고 또 다른 약자의 곁을 지키려는 그린과 레인. 스스로도 취약한 약자인 이들끼리 서로가 내내 평행선 같았지만, 끝내 조우하고 말았고, 이들은 더없이 견고한 공동체를 이뤘다. 이토록 난잡한 아름다움이라니.

흔히들 '돌봄'이라 하면 그저 고단하기 짝이 없는 수발을 떠올린다. '애를 보느니 밭을 매겠다'는, 생산성 지상주의의 말들은 돌봄으로 수고하는 존재들을 순식간에 지워버린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도 못마땅하다. 더러운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내 손으로 치우고 나서 저벅저벅 걸어갈 때의 개운함을 경험해본 적 있는지. 무서운 건 자꾸 똑바로 쳐다보다 보면 안 무서워지고, 더러운 건 말끔히 치우고 지나가면 개운해지는 법이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내게 '돌봄은 무섭지도 더럽지도 않다'는 실현 가능성 높은 판타지를 보여줬다. 아직 '본격적인' 돌봄 행위가 시작되진 않은, 하지만 왠지 장기 돌봄 노동이 보장(?)된 듯한 나에게도, 돌봄이란 솔직히 말해 두렵기 짝이 없는 것이긴 매한가지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선 '왜 안 돼(why no)t?'이란 마음이 불쑥 생겼다. 아니 못 할 게 뭐람.

약자들에게만 끝도 없이 하중이 몰릴 수밖에 없는 기울어진 이 세상에서, 돌봄을 필요로 하는 곳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갈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고 뭐고 내겐 부질없게만 들린다. 돌봄이야말로 하이엔드급 최첨단 미래기술이며, '딸'은 돌봄을 향해 진화해온/진화해가는 가장 특별한 '종(species)'으로서, 어벤져스보다 먼저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성염색체가 반드시 여성일 필요도 없다. 누구든 자발적 진화를 통해 '딸 DNA'를 장착할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상냥해야 한다. 상대방의 언어 중심으로 말을 걸고, 상대방의 컨디션을 먼저 살피는 마음 씀을 연습해야 한다.

<딸에 대하여>. 잔잔하면서 힘 있는 이 영화가 나에게 꽤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소위 '난잡한 친족모델'의 발칙함을 선호하는 나로선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을 참 좋아했는데, 이젠 <딸에 대하여>를 상위권으로 쭉 올리게 됐다.

<돌봄의 온도>를 쓰신 이은주 작가 덕분에 이 영화를 개봉 전에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먼저 볼 수 있었다. 돌봄계의 '요다'와도 같은 그녀와, 짧지 않은 세월을 돌봄에 쏟아부은 나의 벗들과, 그리고 아직은 뭐가 뭔지 모른 채로 좌충우돌할 나 같은 햇병아리들과 함께, 이 영화를 계속 계속 함께 보고 싶다.

 영화 <딸에 대하여>포스터

영화 <딸에 대하여>포스터 ⓒ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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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주로 노동/장애/환경 등에 관한 공연이나 캠페인을 기획. 지금은 자신의 쓰임새를 새로이 궁리해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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